전문위원 윤인모
2024.02.26 11:19 의료복지제도는 자유시장 질서에 필연적으로 종속된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나타난 ‘제1의 길’은 말기에 이르며 복지의 방만함을 드러냈다. 이에 ‘제2의 길’에서는 효율성이 강화됐다. 이 시기 알마아타 선언(1978년)은 재정은 사회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1차 의료는 필수적이며 그 방법은 과학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등 이전의 방만한 복지를 견제했다. 하지만 의료서비스의 실질적 혜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후 앞선 두 시대의 부작용을 해결하고자 하는 ‘제3의 길’로 들어섰다. 이 시기에 세계보건기구(WHO)는 ‘보편적 건강보장’(universal health coverage)을 위한 두 가지 기준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은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Arguing for universal health coverage 2013)
보건 의료정책, 세계적 경향 닮았지만 다른...
이러한 기준 위에서 주요국의 제도 운용방법도 유사해지고 있다. 등산을 예로 들자면 초기에는 걷거나 암벽등반 등의 차이가 존재하였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60년 상호학습의 결과는 달성 목표와 운영방법도 닮게 하였다.
이번에 발표된 정책은 필수의료 회복과 지방 의료 위기 극복이 주목적이다. 대통령과 국민의 개혁 의지는 건국 이래 가장 높다. 그러나 보편적 건강보장 등 주요국의 최소 기준에 부합할지 의구심이 든다. 필수의료 패키지+2000명 증원 정책은 분명한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미흡한 의료 생태계 진단이다. 한국 복지정책은 산업화 시대의 영향으로 저부담-중복지의 기조를 유지해 왔다. 이는 의료분야에서는 소위 ‘끼워팔기’(혼합진료)로 나타났다. 감기 치료(급여)로 내원하면 비타민D 주사(비급여), CT (비급여) 등의 진료를 끼워파는 식이다. 수술(급여)로 내원하면 병실 부족으로 1인실부터 입원하고(비급여), 로봇수술(비급여)을 끼워파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급여 진료환자에게 비급여를 권하는 혼합진료는 보건의료 목표달성에 직접적 저해 원인이 되기에 주요국은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혹자는 주요국도 절반은 혼합 진료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제도 초기에는 필수의료 공급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미용, 통증 등의 비급여 진료가 발달하기 전이기에 혼합진료를 하더라도 주로 필수영역에서 이루어져 공급에 문제는 많지 않았다. 또한 의료비의 빠른 상승과 관련한 부작용은 그보다 높은 GDP증가율 6~10%의 국가 체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중반 이후엔 ▲일과 업무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 ▲학력 인플레이션 ▲비급여 시장 발달 ▲소송 증가 ▲정부의 수가 압박 심화 등 원인으로 의사를 비급여 영역으로 이동시키며 의료비 폭증을 야기했고 필수의료 붕괴의 조짐을 낳았다. 대학병원은 저수가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로봇 수술 등 고가의 비급여 진료를 권해야 만 생존이 가능했다. 급여에서 비급여로 진료 의사의 손쉬운 전환 구조는 간이식 수술을 전공하다가 피부레이저치료로 전향하는 의사를 증가시켰으며 이를 지켜본 의대생들은 졸업 후 곧바로 미용시장 취업을 현명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흡한 진단 부른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인식 결여
한국 의료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패키지는 단지 비급여 시장을 압박하고 수가 인상을 통한 필수의료에 인센티브를 강화하면 의료인력이 다시 필수의료로 유턴될 거라는 기대만 적고 있다.
2000명 증원으로 인해 의사의 증가율은 대략 현재의 2.1%에서 2030년 3.6%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건보수가 1~2% 인상으로는 미용시장 성장률 10~15%를 따라잡을 수 없다. 무리한 정책으로 압력을 가해도 구조적인 격차를 줄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정책에서 언급한 5년간 매년 2조원씩 총 10조원을 투자하더라도 소요 비용을 제외하면 비급여 영역으로 이동 원인을 극복하고 필수의료의 인센티브를 강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2017년 혼합진료에 관한 논의가 잠시 있었다. 단지 비급여를 통제해야 한다는 연구 보고서만 남았을 뿐이다. 이번에도 안과, 도수치료 부분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붕괴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관련한 나비효과도 직시하지 못한 결과로 A형 환자에게 B형 장기이식을 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정책적 오류가 패키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번 정책은 주요국 의료분야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설령 이대로 시행된다 하더라도 당장 내년이면 정책의 오류가 발견되어 차기 대선에서는 해당 정책의 개정 가능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의료제도 운영의 핵심은 재정 운용
잘못된 진단을 보완하기 위한 재정 투자 약속이 남발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 평균 의료비는 이미 OECD 평균 의료비보다 더높다. 그리고 증가 속도는 주요국 1위다. 만약 구조조정이 없이 약속한 재원을 투자하는 경우 의료비 증가는 더 빠를 것이다. 현재 한국의 GDP 증가율은 2%지만 의료비 증가율은 7~8%다. 이는 재정으로 해결할 상황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부족한 재원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필요한 재정 확보를 위하여 보험료를 더 걷는 것 또는 재원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둘 다 국민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조삼모사식의 정책실행과 그 좌초로 인한 정부의 신뢰 저하가 우려된다. 지방의 지역 수가에 대해 가산을 준다고 한다. 이는 수도권 대도시에 사는 국민의 돈으로 지방을 지원하는 꼴이 된다. 돈을 내는 사람과 그 수혜자가 불일치하는 모순이 생긴다. 사회보험료와 정부 재정을 혼동하고 있다.
정책적 미비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지역 완결형 의료전달체계 부분은 기본 요소가 부족하다. 네트워크의 시스템 통합도 주요국의 유사한 정책과 비교해 보면 부족함이 있다. 전문의 중심 병원화를 주장한다. 이는 80여 직종의 파라메디컬(paramedicals. 의료 기사, 치료사 등)의 직종 간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간호법 하나만으로도 국회가 시끄러웠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 재편 과정이 어떠할지는 상상할 수 있다. 지역의료의 돌봄도 역시 세계적 흐름과는 다르다. 돌봄 정책의 전략적 방향은 지역화 정도에 따라 다르다. 한국은 시군구 90%가 소멸을 걱정하는 처지이다.
과제를 직시하며 근본적 대안을 모색할 때
300조 원이 넘는 돈을 쓰고도 출산율 제고를 이루지 못한 정책 실패가 절로 떠오른다. 저출산 진단 오류로 인한 재정 낭비 사례다. 운용 재원의 크기가 훨씬 큰 의료제도의 진단 오류는 더 큰 낭패를 불러올 것임이 자명하다. 한국 의료는 마치 재료가 나쁜 음식에 조미료를 잔뜩 뿌려서 먹어온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치는 반세기 동안 개선 없이 누적된 문제점은 선진화 시대로 진입하며 심한 진통을 겪기 시작했다. 시대는 한국 의료가 체형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복지에 산업을 함께 담아낼 옷이 필요하다. 그 진통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의료는 숫자 놀음만으로 해결되는 영역이 아니다. 시야를 넓히고 깊이 있는 진단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부의 개혁 의지를 긴 호흡에 담아야 한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열린 '전국 의사 대표자 확대 회의 및 행진 행사' 참가자들이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하며 의대 정원 증원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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