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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오리지널②-역사] 작용과 반작용: 몽골로부터 독립하며 슬라브족 정체성을 강화하다

    전문위원 김수한

    2024.10.28 09:02
    [러시아 오리지널②-역사] 작용과 반작용: 몽골로부터 독립하며 슬라브족 정체성을 강화하다

     뉴턴의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이다. 총을 쏘면 탄환이 발사되지만, 총은 뒤로 밀린다.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자 슬라브인들 고유의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류리크 왕조는 노브고로드 공국(862년)-키예프 대공국-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까지 700년 간 지속되었다. 우리 민족의 시조가 단군이라고 한다면, 러시아의 시조는 류리크라고 할 만하다. 류리크를 북방(바이킹)인으로 보는 게 정설이지만, 어쨌든 류리크는 슬라브권이 하나의 세력권으로 형성되는 초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세가 루스 공국들과 연합군을 결성해 몽골군에 맞서 철군시킬 때(1480년)까지 러시아는 몽골의 세력권 내에 복속된 상태였다. 류리크가 862년 세운 노브고로드 공국은 친족인 올레그가 세운 키예프 공국으로 이어졌고, 이후 키예프 공국은 루스 공국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대공국으로서 몽골 침략으로 멸망하는 1240년까지 유지된다.

     여기서 키예프를 공국이라고도 하고 대공국이라고도 해서 헷갈릴 수도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공국은 군주의 작위가 공작이나 후작인 나라를 말한다. 또한 공작이나 후작이 아니더라도 왕보다 작위가 낮은 군주가 다스리는 독립적인 나라를 공국이라 한다. 이러한 공국 중에서 다른 여러 공국들을 아우르는 맏형 역할을 하는 공국을 대공국이라고 한다. 이 대공국의 군주가 대공이다.

     

     키예프 대공국은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모두 조상국으로 여기는 나라다. 하지만 3국은 키예프 대공국의 멸망 이후 정통성 계승에 대해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정통성이 키예프 대공국에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남서부의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은 우크라이나 최초의 국가다. 또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북쪽에는 폴로츠크 공국이 있었는데, 이 나라는 역사상 벨라루스 최초의 국가다.

     

    같은 뿌리의 동슬라브족 3국, 무엇으로 구분됐나 

     그렇다면 무엇이 3국의 구분점일까.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동슬라브족 중 멸망한 키예프 대공국 영토에서 유목민족과 혼혈 상태로 남은 경우(우크라이나인), 모스크바 대공국의 일원으로 카잔 칸국을 정복해 핀-우골어족(우드무르트족) 등을 복속시켜 그들과 혼혈된 경우(러시아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섞여 살며 북방 발트어족들과 혼혈된 경우(벨라루스인)로 나뉜다.

     

     앞서 언급한 슬라브족은 이주, 분화하면서 동슬라브족, 서슬라브족, 남슬라브족으로 나뉘었다. 이 중 동슬라브족은 오늘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공통 조상이 된다. 즉, 이 세 나라는 키예프 대공국이라는 ‘조상국’과 ‘동슬라브족’이라는 민족적 공통분모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한 뿌리였던 이들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으로 분화된 결정적 계기는 몽골의 침략이다. 오늘날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지만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된 탓이 크고,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후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매우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러시아와 분명히 구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키예프 대공국의 일원이던 폴로츠크 공국은 오늘날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독일계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에게 그 지역을 빼앗긴다. 폴로츠크 공국은 노브고로드 공국과 힘을 함쳐 맞서 싸우지만 되찾진 못했다. 폴로츠크 공국은 또한 키예프 대공국이 멸망하자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함께 예루살렘 왕국 가톨릭 튜턴 기사단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유혈 사태 없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된다.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맞닿아 있던 키예프 대공국이 몽골의 침략에 멸망한 학습 효과로 모스크바 대공국은 친몽골적 태도를 보였다. 물론 이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고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가장 북쪽에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자체 세력을 강화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 3개 권역으로 짜여진 틀에 따라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이 생겨난 것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같음과 다름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러시아'라는 국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리투아니아인은 루스인(슬라브족)과는 정체성이 달랐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로츠크 공국을 합병하며 당시 유럽의 주요 문어였던 라틴어로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 루테니아인은 상호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은 친척뻘 되는 같은 어족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사모기티아인을 방언을 쓰는 리투아니아인의 일원으로 본다.(실제로 훗날인 1386년 리투아니아인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보다 보수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사모기티아인도 15세기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하지만 루테니아인은 달랐다.

     

     루테니아인(Ruthenia)은 동방 정교회를 믿는 동슬라브족을 의미하는 라틴어식 표현이다. 루테니아는 (Ruthen: 루스인)+ia(지역, 땅)으로 이뤄지는 라틴어식 단어다. 단순 어원 풀이로만 보더라도 '루스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말이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되지 않은 동슬라브족들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들 이른바 루스인, 혹은 루테니아인은 1480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이반3세가 몽골을 물리치면서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되고, 서유럽과 가톨릭에 매우 적대적 태도를 견지하며 라틴어(가톨릭)식 표현인 '루테니아' 대신 그리스(정교회)식 표현인 '로시아'(Ῥωσσία)를 사용하게 된다. 오늘날 '러시아'라는 국가명이 탄생하는 배경이다.

     이반3세의 손자 이반4세가 모스크바 대공국을 잇는 루스 차르국을 출범시키면서 노브고로드 공국에서 시작한 류리크 왕조는 키예프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을 거쳐 비로소 왕정 국가 '러시아'가 되는 것이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알렉산데르 과그닌은 루스 차르국 출범 후인 16세기 그의 저서에서 루스인이 살던 지역을 3개로 나눴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지배했던 지역은 백러시아, 폴란드 왕국이 지배하는 곳은 흑러시아, 나머지 지역은 적러시아로 표기했다.

     

     백러시아는 오늘날 벨라루스라는 국가명의 기원이 된다. '벨라'는 러시아어로 '희다'는 뜻이고 '루스'는 '러시아'라는 뜻이다. 라틴어로는 '루테니아 알바', 러시아어로는 '체르보나 루스'로 표기되었다.

     과그닌은 백러시아의 중심지를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공은 '백왕'(벨르이 차르)으로 불린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몽골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을 과거 '희다'고 표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러시아 학계에서도 반박이 나오는 등 논란이 많은 상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벨라루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정복한 지역에 붙은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치사 우(y: ~에)와 크라이(краи: 국경, 경계, 변경 등), 접미사(na)로 풀이된다. 뜻은 '국경의 땅'이다.

     우크라이나가 정통성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에서 찾는 것은 몽골이 키예프를 정복한 데 이어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까지 약탈하자 교황이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통치자에게 왕위를 수여하며 동유럽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에서 기인한다.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은 이제 왕국이 되었고, 이후 가톨릭 세계에서 라틴어로 루테니아 왕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루테니아 왕국은 루스적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 왕국이다.

     하지만 적러시아 영역에 위치한 갈리치아-볼히니아인들은 서유럽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교황이 준 왕위를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당시 몽골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려 루테니아 왕국이 실제 몽골을 몰아내는 역할을 하진 못했다.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전러시아, 그런데…

     대신 그 역할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정통성을 부여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해냈다.

     과거에 우크라이나 지역은 '작은 러시아'(소러시아: Мала Русь)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 일대에 걸쳐 있는 우크라이나 중부 지방이 소러시아에 해당된다. 또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방은 '새로운 러시아'(신러시아: Новоросія)로 불렸다. 이와 대비되는 ‘대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국 중심, 오늘날 러시아의 핵심 영토를 말한다.

     

     이렇게 소러시아, 대러시아에 백러시아를 합친 것을 ‘전러시아’라고 한다. '전러시아의 차르'라는 명칭을 쓴 이반3세가 말한 전러시아가 바로 이것이다. 훗날 루스 차르국의 왕도 이 표현을 썼고, 러시아 제국의 황제도 전러시아 황제라는 표현을 썼다. 결국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가 전러시아라는 말이다.

     

     다시 몽골 침공 전 시대로 돌아가서 키예프 대공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대공으로는 스뱌토슬라프 1세, 블라디미르 1세, 야로슬라프 1세를 꼽을 수 있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당대 최강국이던 동로마 제국의 후원으로 불가리아를 정복한 뒤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국력을 끌어올렸다. 스뱌토슬라프 1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동로마 제국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 동맹을 맺는 등 나라를 문명국으로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블라디미르 1세의 어머니는 노예 출신으로 스뱌토슬라프 1세의 첩이 된 말루샤였다. 말루샤는 스뱌토슬라프 1세의 어머니 올가의 섭정 당시 복속된 드레블랴인의 공주라는 설이 있다.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 역시 동로마 제국 황제와 결혼동맹을 맺어 사돈 관계가 되었다. 또한 동시에 스웨덴 국왕의 매형, 노르웨이와 폴란드와 헝가리 국왕의 장인이 될 정도로 대외적 위상이 높아졌다. 하지만 키예프 대공국 특유의 분할 상속제 등이 원인이 되어 이후 수십년간 1~3년에 한 번씩 대공이 바뀌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는다. 이어 몽골이 쳐들어오면서 멸망에 이른다.

     당시는 1236년 대공에 오른 야로슬라프2세 재위 시기로, 1238년 침략을 받은 지 2년 만인 1240년 키예프 대공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칭기스칸의 3남인 오고타이칸은 1229년 몽골의 군주가 되어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중앙아시아 점령에 이어 유럽까지 넘본다. 오고타이칸은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를 유럽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해 15만의 몽골군이 유럽으로 진격한다.

    먼저 우랄산맥을 넘어 볼가강 유역 불가리아를 공격하고 1237년 루스 대공국 중 하나인 랴잔 대공국과 블라디미르 대공국, 1238년 야로슬라블과 트베르 등을 복속한 뒤 키예프 대공국까지 쳐들어갔다. 1240년 키예프가 무너졌고 이어 폴란드, 헝가리까지 진격했다. 바투는 1241년 오고타이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1243년 볼가강 유역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하는 킵차크 칸국을 세워 대부분의 루스를 지배한다.

     

     '동정은 후회를 낳는다'는 칭기스칸의 가르침에 따라 몽골군은 무자비하게 유럽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키예프 대공국 중심의 체제는 붕괴되었고, 1220년 야로슬라프 2세의 아들로 출생한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가 훗날 루스의 희망이 된다. 넵스키는 1242년 예루살렘 왕국의 튜턴 기사단에게 승리하며 영웅이 됐고, 친몽골 정책으로 1246년 키예프 대공, 1252년 당시 모든 루스의 대공 역할을 하던 블라디미르 대공에 오른다.

     넵스키는 튜턴 기사단이 정치적으로 프로이센과 에스토니아 지역을 점령하고, 종교적으로 동방정교회 지역을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자 동진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친몽골, 반가톨릭 정책으로 국내 정적들을 견제하고 국토와 종교를 지켜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추대된다. 이러한 넵스키의 역할은 오늘날 러시아의 핵심 DNA를 구성하게 된다. 이어 훗날 러시아 제국은 그의 이름을 딴 넵스키 훈장을 제정하고, 이 훈장은 소련까지 이어진다.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는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이다.

     

    몽골 침략으로 동슬라브족 정체성은 강해졌지만, 분열은 불가피

     비록 키예프 대공국은 무너졌지만, 류리크의 후손들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명맥을 이어나갔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몽골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토를 확장해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을 복속시켰다. 또 경쟁 관계이던 트베리 공후의 딸,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와 잇따라 결혼하며 이른바 결혼 동맹을 맺었다.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불러 오늘날 모스크바의 대통령궁인 크레믈린과 크레믈린의 상징인 우스펜스키 사원을 건축했고,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제국(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하자 교황청으로부터 제3의 로마 제국이라는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모스크바 공국은 동방 정교회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고, 러시아 정교회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동로마 제국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를 러시아의 공식 휘장으로 쓴 것도 이때부터다. 통일 국가의 통치를 위한 법전 수제부니크도 이 때 편찬했다. 몽골에서 독립하고, 러시아 공후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러시아 정교회와 미래의 루스 차르국(훗날 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에서 이반 3세는 키예프 루스 이후 루스 통치자 중 최초의 통일 러시아 전국의 군주로 평가된다.

     

     또한 이반 3세는 자신을 '전러시아의 짜르'로 호칭해, 러시아 군주 중 짜르(황제)라는 명칭을 최초로 쓴 사람이다. 키예프 대공 이후 자신의 호칭에 '대왕'(러시아어: 벨리끼 또는 벨리까야, 영어: 더 그레이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러시아 3대 군주(이반 3세, 표트르 대제, 예카쩨리나 2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크레믈린, 러시아 정교회, 짜르 등 오늘날 우리가 러시아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당 부분이 이반 3세 재위 시기에 이뤄진 셈이다.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가 집권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루스 차르국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이반 4세는 루스 차르국의 초대 짜르(황제)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반 4세는 1533년 모스크바 대공에 올랐고, 1547년 루스 차르로 즉위한다.

     그러나 이반 4세 사망 후 러시아는 혼란의 시대로 빠져든다. 이반 4세 아들인 표도르 1세가 뒤를 이었지만 1598년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862년 이후 700년간 이어온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겨버린 것이다. 이후 류리크 가문의 외척인 로마노프가 황제에 오르며 로마노프 왕조가 본격 개막된다.

     다음 편에서는 로마노프 왕조의 번성과 몰락, 소비에트연합의 발전과 붕괴, 고르바쵸프의 등장, 옐친에서 푸틴으로 이어진 민주주의 국가 러시아에 대해 조망한다.

     

    (그림=나무위키)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 대공의 초상. 넵스키 대공은 몽골에 의해 붕괴된 동슬라브족의 부흥과 재건을 이끈 인물로 현재까지 러시아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전문위원 김수한

    동국대 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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