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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오리지널③-역사] '제3의 로마' 러시아 제국은 어떻게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가 되었나

    전문위원 김수한

    2024.12.03 13:30
    [러시아 오리지널③-역사] '제3의 로마' 러시아 제국은 어떻게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가 되었나

     이반 4세는 1533년 모스크바 대공에 올랐지만, 1547년 본인을 ‘루스의 차르’라 칭하고 루스 차르국을 세운다.
     건국은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 루스의 모든 역량을 결집한 루스 차르국의 탄생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일인지 알 수 있다.
     건국자 이반 4세의 조부 이반 3세가 루스 차르국의 기틀을 탄탄히 다졌다.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고조), 익조(증조), 도조(조부), 환조(부친)가 이성계 세력의 근원을 마련해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차르'라는 말 자체를 이반 3세 때부터 썼다. 그럼 이제까지 잘 써왔던 '대공'이라는 칭호 대신 왜 차르를 쓰기로 한 것일까. 여기에 엄청난 사연이 숨어 있다.
     먼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멸망 당한 동로마제국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당시는 이반 3세 아버지인 바실리 2세 통치기였고, 이반 3세는 1462년 모스크바 대공이 된다. 동로마제국이 망한 지 9년 후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당시 동로마제국과 자웅을 다투는 위치에 있었다.
     

     이반 3세는 즉위 이듬해인 1463년 야로슬라블을 합병하고, 6년 후(1469년) 당시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조이 팔레올리기나와 결혼할 것을 요청 받는다. 교황은 이를 통해 서로마의 가톨릭과 동로마의 정교회를 통합하고자 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 1472년 결혼하자 교황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제3의 로마 제국’으로 인정한다.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하고 1000년여 뒤 동로마제국이 멸망(1453년)하자 모스크바 대공국에 ‘제3의 로마’라는 정통성을 쥐어준 것이다. 모스크바는 이때부터 동로마제국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 휘장을 공식 휘장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반 3세와 결혼한 조이 팔레올리기나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로서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녀였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는 동로마제국이 망할 당시 모레아 공국의 통치자(데스포티스)로서 콘스탄티노스 11세 사망 후 그 뒤를 이었으나, 형제 간 내분으로 1460년 모레아 공국마저 오스만투르크에게 넘어가면서 그의 딸 조이와 함께 교황령(오늘날의 바티칸시티)으로 망명한다. 조이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그리스식인 조이 대신 소피아로 개명한다.
     

     교황은 동로마의 황녀이면서 가톨릭 신자가 된 소피아를 동서 교회 통합을 위한 적임자로 보았고, 이반 3세는 그녀를 정교회의 맹주로 올라설 수 있는 수단이자 기회로 보았다.
     실제로 소피아는 결혼 후 정교회로 복귀했고, 모스크바는 동로마를 대체하는 정교회의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한다. 이렇게 슬라브권의 정교회가 오늘날의 러시아정교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결혼 이후 이반 3세의 능력도 빛을 발했다. 1474년 로스토프를 병합하고 1480년에는 몽골 세력인 아메드 칸의 군대를 쫓아내면서 완전한 주권 국가로 발돋움한다. 1485년에는 트베리 공국, 1489년은 노브고로드 공화국까지 힘으로 복속시켰다. 동로마가 쇠퇴와 멸망의 시기에 있었다면 모스크바 대공국은 융성기에 있었던 셈이다.
     루스 공국의 맏형격인 끼예프 대공국이 국교로 정교회를 받아들인 건 블라디미르 1세 재임 시절인 989년. 이후 약 500년의 시간이 지나 동로마가 멸망하고 러시아가 동로마를 대체할 정교회의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할지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 러시아가 동로마를 잇는 제3의 로마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반 3세는 왜 ‘차르’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럴 땐 오히려 무슨 왕, 서기 몇 년, 이런 식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보다 좀 물러나 거시적으로 숲을 바라볼 때 큰 흐름이 보인다. 동로마와 함께 정교회 문화권을 형성하던 러시아, 팽창하던 이슬람 제국에 멸망 당하는 동로마, 이를 계승하는 러시아. 서설이 길었다. 제3의 로마로 인정받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자신의 칭호를 대공(크냐지)에서 차르로 바꾼다.
     차르의 어원은 카이사르(Caecar)다. 공화정 로마를 뒤엎고 황제에 올라 로마 황제의 시조가 된 바로 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 카이사르에서 온 말이다.
     카이사르라는 성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로마 황제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다만 류리크를 시조로 하는 이반 3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교황에 의해 제3의 로마로 인정됨에 따라 이제부터 자신이 로마 황제의 가문에 편입되었음을 차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 생존 당시 사용됐던 라틴어식 발음이라고 한다. 훗날 사용된 영어식 발음으로는 '시저'다.
     

     루스 차르국의 건국 정신에는 이 나라가 곧 제3의 로마제국이라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이반 3세와 소피아 사이에서 출생한 차남(바실리 3세)이 뒤를 이었고, 바실리 3세의 아들이 이반 4세다.
     바실리 3세는 1510년 프스코프, 1514년 스몰렌스크, 1521년 랴잔, 1522년 노브고로드-세베르스크와 스타로두프 공국을 병합한다. 또 카잔한국, 크림한국 등 몽골 세력의 침공을 막아내고 정교회를 수호했다.
     이렇게 조부와 부친의 탄탄한 뒷받침을 받으며 뒤를 이은 이반 4세가 루스 차르국을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반 4세의 아들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며 야심적으로 출범한 루스 차르국이 일시적으로 흔들린다.


     표도르 1세는 이반 4세와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1598년 죽자 류리크가 862년 노브고로드 공국을 건국한 이후 736년간 유지되었던 류리크 왕조가 끊어진다.
     그리고 15년간의 혼란기를 지나 외척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러시아 귀족들의 추대로 차르에 추대된다. 로마노프 왕조(1613~1762)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초대 황제인 미하일 1세는 이반 4세의 첫 황후 아나스타샤의 오빠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였다. 또한 우리의 세종대왕에 비할 수 있는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의 할아버지였다.
    모스크바 대공국을 기반으로 루스 차르국(1547~1721)을 건국한 이가 이반 4세였다면, 루스 차르국을 기반으로 러시아제국(1721~1917)을 건국한 이가 표트르 대제였다.
     

     표트르 대제는 어린 시절 차르 계승을 놓고 벌어진 형제, 자매와의 갈등을 피하고자 시골에서 길러졌고, 이 과정에서 서유럽의 선진 문물에 눈을 떠 훗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전반을 서구적으로 개혁하는 추진력으로 삼게 된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은 관료 체제 개혁, 식문화와 복장 문화 등 생활 문화 개혁, 역법 개혁, 화폐 개혁, 의료 개혁 등 사회 전반 모든 분야에서 이뤄진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나라 이름도 러시아 제국으로 변경한다. 그동안 루스 차르국의 러시아어 명칭은 '루스코예 차르스트보'였는데 러시아 제국, 즉 '로시스카야 임페리야'로 변경한 것이다. 루스 차르국의 정체성 자체가 제3의 로마제국에서 출발했으니 루스 차르국의 차르 역시 황제의 격에 해당됨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황제의 서구적 표현인 '엠퍼러'를 국명에 적용하면서 대외적으로도 명실상부한 황제국의 지위를 천명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상테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나라 러시아 제국의 출범은 몽골 침략 이후 루스인들의 거점이 된 모스크바 시대와의 이별이기도 했다.
     러시아 학계는 모스크바 대공국, 루스 차르국 기간에 대해 모스크바 루스라는 용어를 쓴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고 확대되어 대공국, 차르국으로 점점 커져나갔던 시기의 나라란 얘기다.
     루스 차르국의 로마노프 왕조 2대 차르인 아버지, 이복 형 표도르 3세에 이어 로마노프 왕조 4대 차르에 오른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면서 모스크바 시대와 이별했다.  하지만 천도 이후에도 모스크바는 여전히 러시아의 중심지이자 제2의 도시였다.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대관식을 모스크바에서 거행하는 전통을 지켰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 정부가 이듬해 다시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길 때까지 200여년 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러시아 제국 2개의 심장 역할을 했다.

     

    빼어난 미모로 하녀에서 황후, 여제에 오르다 ‘예카테리나 1세’
     이반 3세,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2세는 앞서 언급했듯이 키예프 대공국 시대가 끝난 이후에 자신의 명칭에 '대왕'이라는 의미의 수식어 '벨리키'(남성) 혹은 '벨리카야'(여성)가 붙은 3명의 차르다. 표트르 대제가 1725년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죽었을 때 후계자 황태손이 너무 어렸다. 그리하여 표트르 대제의 2번째 황후 예카테리나 1세가 황제에 즉위한 것이다. 러시아 제국 최초의 여제다.
     폴란드의 평범한 농민의 딸이었던 예카테리나 1세는 하녀에서 황제의 정부, 황후, 황제로 신분이 급상승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원형이다. 그 모든 것은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예카테리나 1세의 폴란드식 이름) 자신의 빼어난 미모로 인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어린 마르타는 스웨덴령 리보니아(에스토니아 북부)로 가서 하녀로 일한다. 그를 하녀로 고용한 요한 글뤼크는 자신의 일기장에 그녀의 미모에 대한 우려를 남겼다고 한다. 마르타는 17세에 스웨덴 군인과 약혼했으나,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이 발트해의 패권을 놓고 벌인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이 패배하면서 루스 차르국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타의 미모는 모스크바에서도 귀족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표트르 1세의 친구인 멘시코프 공작에게 불려가서 그의 정부가 되었고, 멘시코프 공작을 방문한 표트르 1세에게까지 호감을 산다. 멘시코프 공작이 결혼하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자 표트르 1세에게 헌납된다. 그녀는 마침내 표트르 1세의 정부가 되고 표트르 1세의 여러 정부들 중에서 유독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미모로 인하여 러시아 제국은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다. 그야말로 경국지색이라 할 만하다. 표트르 1세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알렉세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멀리하고 하녀 출신의 정부에게만 관심을 쏟는 아버지, 표트르 1세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 표트르 1세는 그런 아들의 역모 조짐을 알고 아들을 체포해 사형을 언도한다. 알렉세이는 1718년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죽는다.

     

     이후 표트르 1세가 사망했지만 황태자의 아들이자 표트르 1세의 손자(황태손)는 너무 어렸기에 표트르 1세의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 1세가 여제로 즉위하게 된다. 폴란드의 평범한 가정의 여성이 하녀 생활을 하다가 황제의 정부가 되고, 1712년 루스 차르국 황후에 책봉었다가 1721년 러시아 제국 출범과 함께 러시아 제국 황제의 황후가 되고 4년 후 표트르 대제의 사망으로 황제에 즉위하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표트르 대제의 사인은 요로결석인데, 52세에 불과했던 그의 이른 죽음으로 체제의 동요가 일어날까 두려웠던 귀족들이 가장 불확실성이 적은 쪽으로 움직였고, 그 방향이 황후의 여제 옹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년 후인 1727년 그녀는 43세의 나이로 죽는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행사에 참가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한다. 그제야 표트르 1세의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너무 어렸고 14살의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죽는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 대목에서 일부 사가들은 표트르 1세의 대를 이을 예정이었던 알렉세이가 정상적으로 제2대 황제에 올랐다면 러시아 왕조의 역사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으로 본다.

     

    제국을 건국한 표트르 대제의 덧없는 죽음…남계 황통은 단절되고

     러시아 제국의 제3대 황제가 이렇게 덧없이 죽으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남계는 끊긴다. 제위는 급한 대로 표트르 1세의 배다른 형제인 이반 5세의 딸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흘러갔다가 이반 5세의 손녀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의 안톤 울리히 공과 낳은 이반 6세가 즉위한다. 여기서 이반 5세 계열과 표트르 1세 계열의 힘의 대결이 펼쳐지고, 표트르 1세의 차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쿠데타에 성공해 제국의 제6대 황제이자 세 번째 여제로 즉위한다.

     아버지의 지성과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그녀는 32살에 황제에 올라 20년 간 재위했다.  결혼하지 않고 후사가 없는 그녀는 표트르 1세 혈통 계승에 중점을 두고 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안나 페트로브나는 북유럽의 홀슈타운고토르프 왕가의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해 표트르 3세를 낳았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고, 스웨덴과 덴마크 왕실과 혈연이 있었다. 이때부터 로마노프 왕조는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로 불린다.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 공작은 스웨덴 왕좌에 오르고자 러시아 황제의 딸과 정략 결혼한 셈이다. 아내는 곧 사망했고, 자신도 아들이 10살 될 때 죽어 아들은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명목상 북유럽 왕가와 러시아 제국의 유력한 계승 후보자였지만, 독자적으로 보유한 영토가 없어 망국의 왕자와 다름없었다.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계인 그를 거둬 베를린 인근 포츠담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이 인연이 역사를 바꾸는 한 줄기 빛이 된다.

     

     표트르 3세는 본의 아니게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유럽 국경이 형성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기 직전 러시아는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과 연합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표트르 3세가 즉위한 뒤 돌연 프로이센과 조건 없는 평화 협정을 맺는 이상한 결정을 내린다. 엘리자베타 재위 당시 힘겹게 벌여온 프로이센과의 전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표트르 3세의 업적은 '다 된 밥에 재뿌리기'였다. 그러한 무조건의 평화 협정을 맺은 이유는 표트르 3세가 당시 자신의 정체성을 프로이센 계통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었고, 프로이센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를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 전쟁에 이겼더라면 오늘날 러시아는 더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을 것이고, 그 영토는 서유럽 한복판까지 뚫고 들어갔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표트르 3세가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마음 깊숙이 묻어두고 있을 것이다.

     

     칼 구스타브손의 역사서 '역사의 서문'에서는 표트르 3세의 부족한 판단이 역사를 바꿨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표트르 3세는 역사적 거물들인 나폴레옹, 처칠, 프리드리히 2세 등과 함께 언급되는데, 그 내용을 조금만 인용하자면 이렇다.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의 열성적인 팬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 전쟁 중 재앙을 맞이할 때 즉위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중단시켰다. 표트르 3세는 곧 죽었지만,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구할 만큼 적절한 기간 살아 있었다. 그는 멍청이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의 유럽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표트르 3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이라고 여겼다. 엘리자베타는 후계자인 그를 역시 독일 출신이자 6촌 친척인 조피 프리데리케와 결혼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들 파벨이 태어나자 파벨을 잘 키워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 조카 며느리 조피 프리데리케는 러시아 황후로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이름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쓰며 러시아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표트르 3세는 러시아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프로이센식 문화에 빠져 있고 프리드리히 2세를 추종했다.

     결국 표트르 3세는 즉위 6개월 만에 쿠데타로 쫓겨나게 되고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2세)가 황제로 즉위한다.
     

    러시아 제국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인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군인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요하나 엘리자베트의 첫째 딸로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독일인으로 그녀 역시 독일인이었다. 러시아 황세자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울리히(훗날 표트르 3세)와 결혼하면서 이름을 러시아식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 개명하고 종교도 루터파 개신교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남편인 표트르 3세는 독일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적 정체성을 추구해 귀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로 즉위한다. 이후 계몽전제군주로서 오스만 제국의 흑해 제해권을 빼앗고 카프카스 지역과 크림 반도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또한 제3의 로마제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회복해 진정한 로마가 되겠다는 '그리스 계획'을 진행한다. 러시아는 그 일환으로 크림 칸국에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명을 그리스식으로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도시의 이름이 오데사, 헤르손,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등이다.

     

     예카테리나 2세도 표트르 1세처럼 아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손자인 파벨 1세를 후계자로 키웠다. 둘 다 조선의 영조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제 아들인 파벨 1세가 황위를 계승하였다가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황권을 강화하던 도중 반발 속에 암살당하고 손자 알렉산드르 1세가 뒤를 잇게 된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인 황제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 수훈을 세운다. 다만, 그가 승전에 기여한 바는 많지 않았다. 그는 훗날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고, 요양차 간 크림 반도에서 사망하는데, 일각에서는 그가 죽지 않고 시베리아에서 표도르 쿠즈미치라는 노인으로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의 동생 니콜라이 1세가 그의 뒤를 잇는데, 니콜라이 1세의 증손자가 바로 우리가 아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다. 족보로 따지면 표트르 1세의 7대손에 해당하는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제위에서 물러나며 황후와 자녀들도 모두 살해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즉위식부터 불운의 연속…호딘카의 비극, 피의 일요일, 2월 혁명, 10월 혁명

     니콜라이 2세는 시작부터 여의치 않았다. 제국은 1894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을 맞이해 이를 축하하는 선물을 마련했는데 빵, 소시지, 케이크, 사탕, 땅콩, 머그잔 등이 담긴 자루 40만 개였다. 그외에 맥주 3만 통, 벌꿀술 1만 통 등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물을 받으러 온 사람이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행사장은 아침부터 아수라장이 되어 1389명이 압사하는 '호딘카의 비극'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04년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전하면서 대외적 위기를 맞이한다. 민심이 크게 악화된 가운데 1905년에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민중들이 빵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대를 향해 황궁 수비대가 발포하고 카자크 기병대가 무력 진압에 나서 100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훗날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건이다.
     

     다시 10년 후인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반면 시민과 노동자들은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파업에 나선다. 1917년 2월 국회의원인 케렌스키가 이런 움직임의 중심이 되어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장관들을 체포해 실권자로 떠올랐다. 궁지에 몰린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3월 15일 퇴위하는 것에 동의해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러시아 연방 임시정부(일명 러시아 공화국)가 수립된다. 이를 ‘러시아의 2월 혁명’이라고 한다.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사형제를 폐지하고 황제 일가를 우랄산맥에 연금시켜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러시아측 마지막 전투인 케렌스키 공세에서 독일에게 밀려 패하면서 케렌스키 정부는 붕괴되고 만다.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이 2개 파로 분열하며 다수파를 형성한 볼셰비키당의 수장 레닌은 이러한 정세 속에서 1917년 10월 25일 케렌스키 정부를 무혈로 전복시키고 집권한다. 이것을 ‘러시아의 10월 혁명’ 또는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한다. 러시아어로 다수가 ‘볼셰’, 소수가 ‘멘셰’다.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는 이듬해인 1918년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고쳐 '무산 계급에 의한 정권 탈취와 체제 변혁'을 위한 혁명을 주장한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적군과 백군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레닌의 공산당이 이끄는 세력이 적군이고 무너진 황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무리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한 것이 백군이었다.

     

    적백내전에서 레닌의 적군이 승리…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다

     이 내전은 나중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민족주의 독립 운동으로 이어진다. 공산 혁명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독일, 중화민국 등이 백군과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하지만 백군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과 모호성, 구심점 부재, 지도층에 대한 불신, 내전의 국제화 등의 요인으로 적군에 패배한다.
     

     적군의 승리로 1922년 12월 30일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한다. 붕괴 시점인 1991년 12월 26일을 기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으며,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소속된 상위 국가였다. 20세기 후반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렸다.
     러시아의 적백내전에 미국, 영국과 함께 일본이 백군을 지원하며 개입했는데,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조선인들은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적군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이 백군을 지원한다고 하니 독립군은 적군을 지원하는 식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적백내전을 계기로 조선에 이어 연해주와 만주, 중국 일대까지 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가상 적국으로 여기게 했고 마침내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격돌하게 되는 태평양 전쟁으로 비화된다. 

     결국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함에 따라 미국은 세계를 이끄는 초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한국은 독립을 이룬다.
     

     적백내전 당시 러시아 귀족들과 지주층, 러시아정교회의 사제 등 백군파들은 난민이 되어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세계 각지로 망명했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동남아시아, 호주, 아프리카 영국 식민지 등 전 세계로 탈출해 무국적자로서 난민 생활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까지 들어왔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내에 거주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자국으로 송환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당시 문학 작품에 쏘냐 등 러시아 여인을 그린 작품이나 단어가 나오는 건 이런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극도의 반소련, 반공산당 정서를 가진 이들은 소련과 맞선다는 이유로 나치 독일을 지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백군 계열의 정서는 미국과 유럽의 반공산당 정서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나치와 반공산당주의, 반소련주의의 결속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뤄진 것이다. 과거 나치 독일군 종사자가 미국에 망명해 CIA 등 정보기관 요원으로 영입된 사례는 나치즘을 반공산주의 전선에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조는 조선의 광복 당시에 일제강점기 일본군 종사자가 미군에 영입돼 반공산주의 전선에 선 사례와 비교할 만하다. 이들의 활동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의 적군 활동이나 중국 공산당 활동을 했던 독립군과 대척점에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광복 이후 반공주의자 vs. 공산주의자의 구도와 친일파 vs. 독립군의 입체적 구도 하에서 갈등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가 나치 독일을 도우면 소련에서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약속해 우크라이나군의 지원을 얻어낸다. 이후 오늘날까지 우크라이나군에는 반소련주의 구현을 위한 나치즘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접경지에서 2014년 발발한 돈바스전쟁을 계기로 네오나치, 극우,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며 결성된 아조우 여단이다. 우크라이나 측 민병대로 시작한 이 부대는 2014년 11월 국가근위대 소속 특수부대로 정부 내각에 편입된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지속 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마리우폴 항전 등의 업적을 세우며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는 동시에 나치 추종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나치 척결이었다.

     

     이반 3세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몽골의 점령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뒤를 이어 제3의 로마로 올라서는 과정은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극적인 느낌을 준다. 루스 차르국 이후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지구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가 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큰 황제의 제국을 이룬 러시아가 니콜라이 2세 치세기에 이르러 한 순간에 완전히 몰락하는 서사 또한 웬만한 영화 스토리보다 극적이다.

     

     러시아의 역사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일까. 춥고 긴 겨울 때문에 백성의 삶이 너무나 극한적으로 어려워 임계점이 그 어느 나라보다 일찍 왔던 것일까. 아니면 춥고 긴 겨울 때문에 러시아인들의 지적 능력과 인식 구조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한 발짝 앞서나가 나타난 귀결일까. 

     흔히 러시아는 밤과 겨울이 긴 나라라서 문학이 발달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 해답은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알아내기 어렵겠지만, 그 어떤 질문도 러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배제하고서는 성립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역사를 3회에 걸쳐 간략히 조망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뿌듯한 점은 ‘러시아는 그리스, 미국은 로마’라는 본인의 판단이 아직 건재하다는 점이다.

     

    (사진=나무위키) 러시아 제국을 건국한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

    전문위원 김수한

    동국대 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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