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안태우
2024.12.02 12:51방송미디어 노동자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내용의 기획 칼럼을 세 차례에 걸쳐 준비했습니다. 시리즈 첫 번째 기획(외줄타기 방송노동자,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두번째 기획(그림의 떡과 같은 근로기준법...노조도, 회사도 외면)에 이어 마지막 기획입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고용 불안의 실태 조사를 분석하는 한편 우리 사회가 더욱 생산성을 높이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대안과 제언을 함께 담아봤습니다. (편집자 주)
방송산업이 위기라고 한다. 지난 7월 24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가 주관해 ’질주를 멈춘 K-콘텐츠 산업 그리고 방송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주제로 국회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따르면 고용불안 당사자들이 체감하는 고통은 전언만으로도 바늘에 찔린 듯 아프다. 토론회에 참석한 방송노동자 A씨는 ”현재의 방송미디어 산업의 경우, 과거에 비해 산업 침체에 더욱 취약한 상황이라 침체가 심화할 수록 현장 일선의 종사자들이 부담을 고스란히 안게 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고, 이에 대한 개선 논의가 없다면 종사자들의 현장 이탈이 심화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허울뿐인 계약 내용, 현장에선 고용주 뜻대로…재주는 계약직, 성과는 정규직
대전 도룡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방송노동자 B씨는 고용 불안을 온 몸으로 겪어왔고 결국 해고됐다. 그는 “며칠 전에 해고 통지를 받아 퇴사했다”며 씁쓸한 미소로 말을 이어갔다. “작고 영세하지만 소수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공익 채널이라 입사했던 게 떠오른다”며 “자아 실현에 대한 꿈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계약 내용과 실무가 달랐던 탓이다. B씨는 “원래 계약직 조연출로 계약했다”며 “그런데 입사하니 편성 업무를 맡는 팀으로 발령됐다”고 밝혔다. 이어 B씨는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업무를 연이어 맡게 되었다. 기본 업무인 편성은 물론이고 정규직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신규 프로그램 기획안 작성도 재주 있다는 이유로 B씨가 떠맡았다. B씨는 “기획안 작성은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인데 아무렇지 않게 시켜서 당황스러웠다”고 전했다. 업무 구분과 책임 여부가 뚜렷하지 못했던 셈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계약직 팀원이 기획안을 작성하지만 성과는 팀장이 모두 가져갔던 것. 그리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팀원과 사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B씨는 “점심 시간 자리 배석부터 성차별까지 다양하게 차별을 겪어야 했다“며 ”언론계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B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기획안 작성 후 외주업체에 프로그램 제작을 맡기던 구조에서 고용주로부터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해보는 것을 제안받은 거다. 계약직으로 예산을 편성받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연출해보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B씨는 수락했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나. 영상 촬영이 끝나고 편집이 마무리 과정에 이르렀을 때 팀장으로부터 명의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권고 사직을 당하게 되었다. B씨는 ”단 한번도 프로그램 연출에 대한 레퍼런스와 구성을 두고 팀장, 원장과 함께하는 회의를 한 적이 없다“며 ”계약직이 성과를 내면 정규직이 채가고 꼬리를 자르는 구조가 반복되었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다.
한빛센터에 따르면 179명의 전·현직 방송미디어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노동실태 조사에 따르면 방송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 4명 중 1명 꼴로 서면계약 없이 일하고 있었고, 방송제작 계약이 비자발적으로, 예측불가능하게 종료됐다고 밝힌 경우가 79%에 달했다. 이중 57%p는 제작 종료를 이유로 일을 그만뒀고 12%p는 해고·권고사직을 당했다. 9%p는 제작이 중단되며 일자리도 없어졌다고 답했다.
침체해 가는 방송미디어 산업,방송 현장은 여전히 불안하다
방송미디어 산업은 공영방송이 시작된 시기로부터 63년만에 가파르게 성장했다. 지상파 4개 채널을 비롯해 케이블 TV, 종합편성채널 출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시장의 확대로 인한 콘텐츠 제작 편수가 꾸준히 증가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방송미디어 산업에 종사하는 방송노동자의 일자리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펜데믹을 겪으며 콘텐츠 수요는 폭증했고, 관련 산업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하지만 엔데믹으로 저물면서 산업도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방송노동자 C씨는 “콘텐츠 제작 중이었음에도 제작이 무기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콘텐츠 제작이 완료되었지만 편성을 받지 못해 제작사로부터 임금과 제작 대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전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이는 저를 비롯한 수많은 동료가 현재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비정규직 방송노동자가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이나 작품을 기준으로 단기로 고용되어 일하는 형태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C씨는 “이러한 고질적인 불안정한 고용 형태가 고쳐지지 않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산업의 불황을 직격탄으로 맞고 있으며, 나아가 생계마저 유지하기 어렵다”고 외쳤다.
이러한 상황은 방송 노동자가 방송 현장으로 빠르게 복귀하지 못하는 현실과도 맞물린다. C씨는 ”현재 제작 중인 콘텐츠는 호황을 이루던 몇 년전의 몇분의 일 수준으로 매우 적어 재취업은 꿈“이라며 ”방송 현장으로 돌아갈 자리가 없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자가 비싼 신용대출을 받아서 생활하거나 배달, 물류창고, 커피숍, 편의점 등의 아르바이트 또는 여러 가지 제조 공장의 일용직으로 근무하며, 꿈을 다시 실현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방송미디어 산업 자체가 침체되기 시작하며 방송 노동자도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방송은 꿈이지만 죽음…미비한 처우 문제, 고용 안전망 제도 마련되어야
이날 고용불안 관련 국회 토론회에 패널로 나선 김기영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장은 “6년 전 노조가 만들어지고 노동조건과 페이가 개선됐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있다. 드라마 제작 편수가 줄며 불합리한 구조를 참고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2024 방송현장 고용불안 실태조사 결과 및 시사점>을 발표한 김희라 한빛센터 기획차장에 따르면 “방송미디어 산업이 급격히 팽창하였지만, 이러한 팽창이 침체로 돌아서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주요 지상파 및 OTT 사업자별 매출 및 영업손익(‘19년~’23년)에 따르면 2022년 KBS의 매출이 1조 4692억 원까지 오른 데 반해 2023년 1조 3685억 원으로 떨어졌다. MBC, SBS, EBS도 각각 ▲8491억 원→7300억 원 ▲9612억 원→8191억 원 ▲1919억 원→1892억 원 등으로 감소했다. OTT 플랫폼도 넷플릭스와 티빙을 제외하고는 매출과 영업손익이 대폭 하락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이에 방송 노동자를 위한 고용 안전망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태조사에 응한 방송 노동자 D씨는 “계약직 채용이 너무 많아 직업 안정성이 떨어진다”며 “방송미디어 업계는 다른 어느 산업군보다도 기형적으로 비정규직이 많다”고 진단했다. 이어 “프리랜서나 단발성 프로젝트 건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럴 경우 고용 보장에 대한 것이 매우 불안해 이런 상황을 개선하는 정책이 뒷받침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B씨의 사례처럼 부당한 업무 계약 종료와 해고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방송 노동자 E씨는 “제작비, 갑작스런 제작 중단 등의 이유로 갑작스레 해고되는 일 등을 막을 수 있거나 그 경우에도 비용을 지급 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더불어 표준계약서를 작성해 서면계약 형태의 업무 계약이 일반화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고용불안 피해를 겪어도 피해를 입증할 수 있게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보험과 고용복지 서비스 그리고 고용 시장의 체계화와 투명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응답자의 40%에 가까운 비율이 산재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에 가입한 경험이 없다고 응답했다. 일자리 상실 후에 생계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수급받는 실업급여 경험은 더욱 적게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의 38.5%만이 실업급여를 수급받아봤다고 응답한 것이다. 이러한 조사가 드러내는 것은 자명하다. 예측 불가능한 업무 계약 종료와 해고를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산업 특성상 제도적 차원에서 지원 받는 게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살아남고 싶다, 방송미디어 산업 침체와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결 모색해야
방송미디어 산업 침체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낳았다. 대표적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승인된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이다. 파견법은 고용과 사용이 분리된 근로형태로서 직업안전법상 규제되던 근로자 공급 유형 중 파견사업주와 근로자 사이의 고용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를 분리하여 합법화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펜데믹 이전부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가속화됐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조사한 <2016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상파 방송사의 방송 프로그램 제작·구매비에서 외주 제작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51.8%에 달했다. 그러나 제작관리는 방송사가 맡는 것으로 보고됐다.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 OTT 시장의 확대, 엔데믹 등 방송미디어 산업 침체에 영향을 주는 외부요인이 발생하면서 방송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탈집중화된 생산 시스템 채택, 하청체계 구축, 내부 직무 개편 등의 노동 유연화를 시도했다. 실제로 외환 위기때 지상파방송사 인력의 10%~29%가 감축되거나 자회사로 분사됐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때일수록 대통령 직속 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의 역할이 주문된다. 방통위는 방송산업 관리 감독과 증진에 주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방송사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적극재정이 필요하다. 2021년 2억 9000여만 원을 제외하곤 2022년, 2023년, 2024년 모두 3억 원의 예산으로 외주제작 실태조사와 외주제작 거래 가이드라인 이행점검 등에 지출됐다. 피해 노동자 사례가 계속해서 나오는 만큼 추가 예산을 편성해 표준계약서를 기준으로 계약과 실무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관리 감독해야 한다.
무엇보다 작품 단위로 제작할 수밖에 없어 계약직 위주로 돌아가는 산업 구조를 바꾸는데 실질적 기여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방통위는 방송 콘텐츠를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로 인식해야 한다. 2025년도 예산으로 ‘미디어 콘텐츠 산업 성장 지원 예산’에 712억 원(최다액)을 편성한 만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송미디어 산업의 전문성을 제고하기 위해 방송 노동자의 재취업 기회도 넓혀야 한다. 방통위의 적극적인 역할은 궁극적으로 산업을 이끄는 고용주만 아니라 방송 노동자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방송 노동자가 초(超)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해 스스로 권익을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방송계 노동과 노동권 개념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노동조합에서 기존의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기본 방식은 사업장 단위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이 일반화되어 있는 방송미디어 산업에서 이러한 관점은 고용 형태나 소속에 따른 차별을 재생산하고, 자본이 위험과 비용을 외주화하는 한계를 가져왔다.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구성원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례와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사업장 단위를 넘어선 조직 확대가 실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방송미디어 산업은 누군가에게 생계를 유지하는 일터이자 꿈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태도다. 방송사도, 방송 노동자도, 방통위도 뾰족한 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다같이 머리를 맞댄 바로 지금, 고질적인 방송미디어 산업의 침체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할 때다.
(사진=연합뉴스) 영화 ‘기생충’ 속에서 기택이네 동네에 폭우가 쏟아져 기택의 아들(최우식)이 뛰는 장면을 영화 스태프들이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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