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4.12.18 11:52러시아가 2000년 처음 제안했던 국제남북운송회랑(International North-South Transport Corridor·INSTC)이 25년 동안 개발된 결과, 2025년부터 무역길로 본격 활용될 전망이다. 오랜 세월 공고하게 구축된 서방국가 중심의 세계 물류 질서와 무역 체제의 대혁신을 통해 세계 경제 체제의 기저를 뒤흔들 수 있을지 주목된다.
“멀리 보고 닦은 길…러시아-아시아 잇는 전략 길”
INSTC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인도의 뭄바이를 연결하는 7242㎞ 길이의 국제적 다용도 무역로다. 러시아 항구도시 아스트라한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이란의 반다르 안잘리-테헤란-반다르 아바스 항구를 거쳐 인도 뭄바이항까지 간다.
이 회랑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과 페르시아만, 인도양 국가를 연결하는 해상 경로의 대안이다. 러시아-이란-인도 등 주요 브릭스(Brics) 회원국 간 운송 협력 촉진을 목표로 구축됐다. 실제 상품 배송 시간은 기존 해상 경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1.5배 단축된다.
INSTC는 러시아에서 인도까지 연결된 3개의 운송 루트로 구성돼 있다. 카스피해를 통과하는 방법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을 통과하는 서부회랑 △카스피해를 해상으로 통과하는 종단회랑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경유하는 동부회랑으로 구분된다.
2000년 관련 논의가 처음 시작돼 추진기구가 설립됐다. 러시아와 인도, 이란,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오만, 타지키스탄, 터키, 우크라이나 등 총 13개국이 INSTC 발기인 국가들이다.
물동량 세 배 증가, 운송 기간 절반 단축 효과
지난 2023년 8월 러시아를 출발해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는 화물이 이란을 경유해 성공적으로 운송됐다. 러시아와 이란은 같은 해 5월 162㎞ 길이의 아스타라(아제르바이잔)-레쉬트(이란) 구간 철도 건설에 관한 정부간 협정에 서명했다. 전체 프로젝트 가치는 16억 달러(한화 약 2조 3004억원)에 이른다. 철도가 완공되는 2027년이 되면 러시아에서 이란의 남부항만까지 잇는 철길이 뚫리는 셈이다.
2030년이면 INSTC 전체 물동량은 현재 1500만 톤에서 4100만~4500만 톤까지 증대될 예정이다. 인도가 이 무역길을 적극 활용하면 러시아-인도 간 운송 시간도 수에즈운하 노선보다 15일을 단축하고 비용은 약 30% 절감할 수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부담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아> 보도에 따르면, INSTC를 이용한 무역은 극동지역 도로 및 철도를 이용한 무역보다 수익성이 54% 더 높다.
게다가 인도에서 출발한 컨테이너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러시아로 가려면 약 30~45일이 걸린다. 하지만 INSTC를 따라 운송하면 18~30일로 단축할 수 있다.
서방 제재 회피 가능한 무역로…러, 인도 모두 윈-윈
하지만 이런 가성비만이 전부가 아니다. 카스피해를 따라 러시아로 가는 INSTC의 장점 중 하나는 유엔 제재 물품인 특수장비, 기계장치, 전기기계 등을 운송하는 데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이란과 인도양을 통해 중국과 교역할 경우 인도에서 러시아로 복합 공급망을 갖출 수 있다.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 제재 속에서 새로운 교역로와 수출 시장을 모색해 왔다. 특히 기존의 큰 시장인 유럽으로 에너지 수출이 제한되는 러시아 입장에서 인도는 에너지와 원자재 수출을 위한 새로운 거대시장으로 급부상했다. 인도 역시 러시아로부터 에너지와 유화 제품, 원자재, 비료 등을 더 많이 수입할 수 있게 되는 한편 러시아가 경제 제재로 고립되면서 발생한 공백을 자국 기업들의 진출과 수출 확대로 메우려 한다.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의 절반 이상이 원유 및 석탄이다. 두 품목은 최근 교역량이 급증했고, 비료 수입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러시아로 소비재를 수출하는 몫도 커질 전망이다. 인도산 차(tea)나 쌀, 커피, 담배, 의약품 등이 주요 대러 수출품들이다. 인도는 경제 제재로 러시아로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플라스틱과 유·무기 화합물, 가구·조명·인테리어 소품 등으로 교역을 확대, 수출 규모를 현재보다 20억 달러 확대할 계획이다.
러시아와 인도 간 교역액은 코로나19가 가장 심각했던 2020~2021년을 제외하고 지난 몇 년간 증가 추세를 보였다. INSTC 활성화에 따라 러시아와 인도는 교역 잠재력의 실현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INSTC를 통해 지역 내 물류 인프라와 제도 개선이 촉진되면서 회원국간 교역이 전반적으로 증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흑해와 카스피해 잇는 운하도 경제성 높아져
카스피해를 통과하는 INSTC 이용 컨테이너 운송량이 증가하기 시작하면 러시아와 남아시아 국가 간 배송 시간이 적게는 10%, 많게는 50%나 단축된다.
러시아는 볼가강에서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역에 해운 운하 준설작업을 이미 진행 중이다. 타타르스탄에는 스비야즈스크 물류센터를 짓고 있고, 흑해에서 돈강-볼가강-카스피해로 이어지는 운하를 지나는 로스토프나도누의 항구 인프라를 현대화하고 있다. 전체 경로를 따라 강과 운하의 바닥을 12~16m까지 깊게 하면 선박의 적재량이 30%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게 해운 물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러시아는 카스피해 아스트라한 항구 지역의 운송 및 물류 인프라를 현대화하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시행 중이다. 부패하기 쉬운 상품 처리시설을 포함, 화물 터미널망 확장을 위한 과정에 돌입한 상태다. 이는 INSTC를 따라 러시아 농산물 수출이 증가한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맥락이다.
물류업계에 따르면, 2023년 러시아 항구의 전체 화물 회전율에서 카스피해 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이었다. 그러나 현대화 프로젝트를 시행한 후에는 이란 영토를 통과하는 카스피해 횡단 항로를 따라 화물 회전율이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러시아 의회인 국가두마 교통위원회는 INSTC의 모든 방향으로 오가는 러시아 화물 운송량은 현행 연간 1700만 톤에서 2030년까지 3000만 톤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기술적 역량을 통해 컨테이너 국제 운송을 포함하면 연간 최대 1억 톤의 화물을 운송할 수 있다.
INSTC의 바다 방향 외에도 이란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육지 지점이 있다. 서쪽은 라쉬트 시를 통과하며 도로를 통한 물품 운송을 제공한다. 동쪽은 카스피해 반대편에 있는 아시아 3국(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철도를 이용하는 동부회랑이 있다. 국가두마 교통위에 따르면, 러시아는 오는 2030년까지 INSTC의 교통인프라 개발을 위해 약 2800억 루블(한화 약 3조 80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유라시아 남북 무역로, 인도 관통해 북극 항로로 이어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에도 INSTC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0월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브릭스 비즈니스 포럼에서 “러시아는 신뢰할 수 있는 외국 파트너들로 교통 흐름을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대표적인 프로젝트에는 북해 항로와 남북운송회랑이 있다”며 “INSTC는 페르시아 만의 터미널과 북쪽의 러시아 항구를 연결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대륙의 동맥들은 수익성 있는 짧은 무역로를 제공하고 대규모 산업, 농업 및 전력 허브를 소비자 시장과 연결하도록 설계됐다”고 덧붙였다.
카젬 잘랄리 러시아 주재 이란 대사는 10월 중순 “이란이 2025년 INSTC 서부 노선의 마지막 구간(라슈트-아스타라 구간) 건설을 시작하고 약 3년 안에 완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잘랄리 대사는 “서부 노선 프로젝트 실행의 시작인 이 공사가 2025년에 시작되기를 바란다”면서 “2024년 시작이 예상됐지만, 여러 문제로 여의치 않았고, 프로젝트 자체는 약 3년 후에 실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즈베스티아>는 2025년부터 러시아가 INSTC 무역길을 통해 컨테이너 운송을 늘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러시아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로스토프, 아스트라한 지역 항구와 이란 항구 반다르 압바스 사이에 화물을 운송할 ‘볼가-돈’ 강을 잇는 운하용 특수 선박 4척을 진수할 계획이다. 이 노선이 바로 TSR 철도나 수에즈운하 통과 해상 노선의 대안이 돼 상품배송시간을 1.5배 단축하고 물류비도 54% 절감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야심차게 준비 중인 북극 항로도 INSTC와 연결된다.
이해영 성공회대 교수는 “러시아는 INSTC의 인도 기착지 뭄바이에서 육로를 거쳐 첸나이로 연결, 다시 뱃길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면 북극 항로로 편입될 수 있다”고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푸틴 대통령은 북극 항로와 관련, “북해 항로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핵추진 선박을 포함한 쇄빙선 함대를 보충하고 위성 배치(Constellation)도 현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란 지정학, INSTC 성공의 변수
서방은 러시아가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무역로로 INSTC를 활용하는 점은 무역로 자체가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돼 있는 방증이라고 강조한다.
캐나다 토론토에 본점을 둔 지정학 자문 지식채널 '지정학모니터(geopoliticalmonitor.com)'는 지난 9월 중순 “INSTC는 브릭스 회원국들에게 미국 제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무역 흐름을 재지정하는 프로젝트로, 블록의 근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20년 이상 중단돼 왔고, 카스피해 구간의 철도 격차를 메우고 터미널 용량을 확장하기 위해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게다가 미국 제재는 이 프로젝트에 칼처럼 계속 걸려 있어 추진력을 앗아간다”고 지적했다.
이 채널에 기고하는 서방의 칼럼니스트 자차리 필링험은 최근 칼럼에서 “INSTC는 거의 25년이 지나도록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 빙하기적 속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지정학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지연은 주로 무역 회랑의 창립 멤버이자 핵심 다리인 이란에서 비롯되는데, 이란은 종종 INSTC에 해를 끼치는 서방의 제재를 받는다”면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재임 당시 ‘악의 축’ 제재에서 핵 확산 관련 제재, 1990년대 테러 관련 제재 등 3분야 제재가 이란에서 인도, 러시아 기업의 경영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했다.
서방은 트럼프 2기 정부가 이란의 약한 고리를 적극 공략하라고 부추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가 이란의 핵폭탄 제조를 막기 위한 선제 공격 아이디어를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은 최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전화 통화를 통해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를 논의했다고 인정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다만 자세한 언급 없이 “우크라이나-러시아 갈등보다 중동을 해결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수범 인천대 동북아물류대학원 북방물류사업단 부단장 역시 비슷한 우려를 했다. 최 부단장은 “INSTC는 러시아 항구도시 아스트라한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이란의 반다르 안잘리-테헤란-반다르 아바스 항구를 거쳐 인도 뭄바이항에 닿는 무역로로, 이란 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예상만큼 활성화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 입장에서 이 무역로는 국제협력 측면에서 상징적인 면이 강하고 활성화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INSTC가 주변 지역의 군사・외교적 긴장 때문에 제한을 받을 정도의 ‘단소경박’한 배경과 맥락을 가진 무역로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경제학 박사인 성원용 인천대 교수는 “INSTC는 러시아에서 이란-인도로 연결되는 노선이기 때문에, 시리아 정변 등 서아시아 긴장고조가 곧바로 무역를 막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성 교수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바로 그 약한 고리를 노렸기 때문에 이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축은 당분간 영향을 받겠지만, 시리아 문제로 흔들릴 무역길 개척사업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최근 러시아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과 협력을 강화하는 흐름을 보면 이란-인도-아세안으로 연결되는 물류축이 더욱 발전될 전망”이라며 “러시아와 EU의 관계 회복에 한 세대가 걸린다고 본다면, 이 노선은 그냥 한 세대에 걸쳐 아시아로 나가는 대안의 장기 프로젝트라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세계 물류 체제의 대혁신, 앞으로 몇 달 더 지켜봐야
INSTC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정학, 지경학적 변수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세계 물류 체제의 대혁신이 거저 이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트럼프 당선인이 어떤 정책적 입장을 취할지 또한 핵심적으로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INSTC 관련 국가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브릭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무역 통상의 틀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굳은지 확인하는 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련의 도전과 응전 속에 INSTC의 운명이 더욱 선명하게 가시화할 전망이다.
(지도=대외경제정책연구원) KIEP 세계경제보고서(2022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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