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4.12.20 12:19“트럼프 당선 이후 국제사회의 우크라이나 종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당선인의 의지가 강해도 단기간 안에 종전은 쉽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조태열 외교부장관이 지난 18일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합동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트럼프 당선인의 1월 취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전망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한 말이다.
조 장관 답변의 요지는 ‘트럼프 2기 내각이 어떤 구체적인 외교적 주도권(initiative)을 갖고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를 다룰지, 또 그 주도성이 어떻게 관철되고 진행될지 모든 게 불투명하다. 게다가 전쟁 자체가 매우 복합적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빠른 종전은 쉽지 않다고 본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한국의 외교부 관료들은 매우 보수적으로 상황을 판단한다. 해당 상황이 분명한 실체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부에 표출해야 할 경우에는 ‘이념적’으로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
같은 날 우크라이나 대사까지 지낸 박노벽 전 러시아 대사가 '트럼프는 자국 우선주의자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전쟁이라고 여기면서 취임 후에는 유럽이 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내팽개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게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제성훈 한국외국어대 교수(모스크바 국립대 정치학 박사)는 베테랑 외교관의 보수적 판단에 비판적이다. 제 교수는 국제사회가 공고화 하려는 ‘러시아의 침략 전쟁’이라는 프레임 대신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앞세워 러시아와 수행한 전쟁’이라고 보는 러시아 전문가다. 제 교수는 유럽이 예나 지금이나 자체적으로 안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구나 유럽은 3년 가까운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동안 시중가의 40% 수준이던 러시아 파이프라인천연가스(PNG) 대신 시가보다 훨씬 더 비싼 미국의 셰일 액화천연가스(LNG)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유럽 경제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라는 점 역시 ‘유럽의 자체 해결’ 가능성을 낮추는 변수다. 미국이 손을 뗀 뒤 유럽이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취임 후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측은 그 방법을 두고는 크고 작은 변화를 보였다. 기본적으로는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는 방침이지만, 현실성은 둘째 치고 논리적 모순도 안고 있다. 현재 전선을 동결하고 비무장지대를 조성한다는 방안이며, 비무장지대를 통제하는 평화유지군에 미군과 미국이 지원하는 국제기구도 포함되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이 알아서 하라는 걸로 해석된다.
또 우크라이나가 최소 20년간 나토 가입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러시아의 잠재적인 침략을 막을 수 있도록 무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방안도 포함된다. 제 교수의 분석을 곁들여 트럼프 당선인의 해법을 요약하자면, 러시아에게 ‘유럽의 굴종’을 포함한 승리를 안겨주고, 미국은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를 더 무서워할 나라들에 무기를 더 팔겠다는 속내다.
트럼프 해법에서는 특별히 논리 모순도 발견된다. 러시아 측에는 “협상에 안 나가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하고, 우크라이나 측에는 “협상에 나가지 않으면 무기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러시아에 이 말은 “당신들이 협상에 나선다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단기적 종전 압박이다. 러시아가 협상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때문에 트럼프가 1월 20일 취임 뒤 행동으로 옮긴다면 당장 종전협상이 개시될 수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이 말은 “협상에 나서면 계속 무기를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상 “지금은 불리하니 일단 종전한 뒤 훗날 다시 도모해 보자”는 제안인 셈이다. 나토 가입 하지 말고 일단 미국 무기는 계속 배치해 줄테니 전쟁을 끝내라고 하는 말이다. 트럼프가 나토 해체 주장까지 했으니, 나토를 믿지 말고 미국을 믿으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젤렌스키는 속이 탄다. 트럼프 당선인은 바이든 대통령처럼 녹록하지 않고 셈이 확실하니 말이다. 젤렌스키는 러시아 화학전 부대장을 테러로 죽이고, 파병 북한 병사 짤(짧은 영상)을 만들어 전파하느라 연일 바쁘다. 이런 안간힘은 젤렌스키가 1월20일(트럼프 취임식) 이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가 내세우는 종전 전제 조건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러시아가 가장 반대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는 반드시 가입하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땅이 된 4개 지역을 되찾고, 국제사회가 전범 재판을 통해 푸틴 대통령을 반드시 처벌해야 하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전쟁 배상금을 치르도록 담보를 확보해줘야 한다는 이른바 ‘승리계획’은 바이든 대통령조차 손사래를 칠 정도다.
러시아의 입장은 개전 초기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우크라이나와 합의했던 종전안과 크게 변한 게 없다.
우선 러시아와 협상을 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 둔 우크라이나 대통령령을 철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지난 5월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는 전시 계엄령으로 위헌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 입장이 특별군사작전을 시작한 가장 큰 명분이라는 점에서, 젤렌스키의 종전 전제 조건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나토만은 꼭 가입해야 겠다(우크라이나)”는 입장과 “나토 가입만은 안 된다(러시아)”는 입장이 팽팽하다는 것만 봐도 종전이 쉽지 않고 전쟁이 장기화 될 수 있다는 조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한국이 특별히 걱정스러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전쟁 와중에 러시아와 북한이 극적으로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외신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우크라이나전을 계기로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 협력이 이뤄지고 북한군 파병까지 이뤄졌다”며 “북한이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 태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과대평가한 것 같다. 러시아에 파병을 하면서 한국을 향해 도발도 할 수 있다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러시아가 북한과 가까워지면 한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상황, 가령 ‘한국전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폐허가 된 극빈국 시절의 사고 방식이다. 한국이 정말로 북한을 특수 관계자로 여기고 언젠가 통일을 해야 할 상대로 여긴다면 더더욱 가까운 과거의 실책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태우 정부는 1980년대 말 소련 해체 후 1990년대 들어 극심한 경제난(이른 바 ‘고난의 행군’) 와중이었던 러시아와 공식 수교했다.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는 당시 러시아와 손을 잡은 것은 귀중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당시 러시아가 북한과 소원해지면서 향후 30년 간 한반도가 핵무기 경쟁의 중심부가 됐다는 점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제성훈 교수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긴밀하다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안보와 경제적인 번영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해야 하는 게 옳은 길”이라고 말했다.
강산이 예닐곱 번 바뀌었는데 한국은 여전히 진영 논리에 갇혀 주술처럼 ‘한미동맹’을 신봉한다. 나토 회원국도 아닌 나라의 외교부 장관은 군사안보 문제를 집단서방(collective western)의 뇌를 빌려 사고한다. 당사자(남북)간 문제를 숙고하기 앞서 혈맹의 이해관계부터 헤아리는 모양새다. 강대국이 숭고한 이념을 앞세우는 것은 스스로 이념을 신봉해서가 아니라 약소국이 ‘이념적으로’ 행동해서 기꺼이 지정학의 총알받이로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함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인들을 ‘황국신민’이라고 부르며 대동아 성전으로 내몰았던 것처럼, 젤렌스키가 자국민 백만여명의 피를 미국의 대리전을 위해 바쳤던 것처럼.
나라 안팎에서 혁신의 계기가 초래됐다. 바람직한 외교의 일머리를 다시 잡아야 할 기회다. 언제든 패권자에게 나라의 유무형 자산을 팔아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을 정치 영역에서 도려내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다양한 남북관계 가버넌스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남북이 진정한 ‘특수 관계’라면서 강대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놀아나는 어리석음을 거둬야 한다. 자기 뇌로 사고해야 한다. “계엄 반대, 대통령 탄핵”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걸 모르고 있다면, 한국 지식인들은 좀 더 고난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사진=이상현 기자)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18일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원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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