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3.13 17:20“트럼프 개인의 단점이나 그가 추진하는 정책의 문제점을 방관자적 관점에서 지적하고 비난하는 자세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어디로 가는가? : 미국의 구상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긴급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요즘 한국 지식인들의 오류와 한계를 요약한 ‘촌철활인’이다. 한국 지식인들을 따끔하게 꾸짖는 학자의 말은 그러나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 ‘모르는 게 뭔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게으름과 독선'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불안한 국내 정치로, 한국 외교는 철 지난 바이든 정부에 여전히 꽁꽁 묶여 있다.
미국의 행동을 한국의 처지로 이해하려는 오류
한국 지식인들과 언론은 연일 ‘오락가락 하는 트럼프의 대외통상정책’이라며 비판한다.
‘부동산 재벌 출신의 괴팍한 부자가 미국의 이익만을 위해 동맹국들을 괴롭힌다’는 서사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이미 익숙하다. 게다가 ‘트럼프가 러시아 푸틴과 손을 잡고 불쌍한 우크라이나를 착취하고, 한국 이익과 결부돼 있는 중국을 옥죌 시동을 걸고 있다’고 짐짓 점잖게 비판한다. 관세 폭탄은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증시를 얼어붙게 한다고 오지랖 넓은 비판도 거침 없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관료사회는 미국 바이든 정부까지는 그럭저럭 궤를 맞췄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를 허용한 것도 그저 못본 척 했다. 과세 당국만 가상화폐 양도 차익에 세금 물리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트럼프가 가상화폐 비축 정책을 법령으로 추진하는 가운데, 이 정책이 불러올 미국 국채 시장과 달러 기축성 등에 대해 논하는 한국의 경제학자는 찾아 보기 힘들다. 지구촌 증시를 위협하는 경기 침체의 근원이 ‘트럼프’라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트럼프가 왜 저런 정책을 펼치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나라 빚 갚으려 안간힘 쓰는 트럼프
미국은 필요할 때마다 달러를 찍어내 수십 년 간 재정 정책에 활용했고,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달러량 증가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 중인 러시아 해외 자산 동결 등 미국의 횡포를 지켜본 브릭스(BRICS)와 지구촌 남반구(Global South)의 ‘달러 기피’, 코로나19 이후 역대급 달러 증가 발행 이후 달러의 잠재 가치가 크게 낮아지면서 미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트럼프는 불법거래로 몰수한 가상화폐에 이어 일론 머스크 등 초국적 부자들이 보유한 가상화폐를 미 재무부 채권으로 사들여 국고에 비축, 미국 국채 금리를 안정화 시키고 시중 금리도 낮출 기반을 확보할 계획이다.
초국적 부자들이 미국 국채를 갖고 있으니, 미국 국채 수요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 국채 수익률은 낮아질 것이다. 그러면 연간 1조 달러가 넘는 국채 이자부담도 크게 덜 수 있고, 나라 빚도 상당부분 갚을 수 있다.
이게 미국의 쌍둥이 적자 중 ‘재정 적자’에 맞서는 트럼프 경제 정책의 한 축이다. 과거 어떤 역대 정권도 국가 지속가능성의 핵심인 ‘신뢰받는 미국의 재무 구조’를 회복하려고 애써 본 적이 없다. 돈을 잘 아는 트럼프가 엄청난 혁신과 개혁으로 미국의 살림살이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국의 재정적자, 무역적자는 패권국 지위도 위태롭게 해
트럼프는 미국 ‘쌍둥이 적자’의 다른 한 축인 ‘무역 적자’ 해법도 이미 실행에 옮겼다. 4차원적 압박과 협력을 통한 대외 통상 관계 재구조화, 이를 통한 통상 이익 극대화로 요약된다. 트럼프는 미국의 단일 패권을 거부하는 정치적 수사(rhetoric)를 반복한다. 트럼프는 역대 미국 정부의 상계관세(Countervailing duties)를 넘어 그동안 강대국의 아량으로 당연시 돼 온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 카드도 꺼냈다. 여기에 도발적인 ‘일반 관세’까지 아우르며 전방위 관세 전쟁을 선포했다.4
미국은 이미 세계무역기구(WTO)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트럼프만의 공로가 아니다. 3층 혹은 그 이상의 다층적 관세 전선은 교역 상대국과 수많은 조합의 협상 카드를 의미한다.
‘동맹국’ 어쩌고 하는 것은 그동안 미국이 얼마나 동맹국들로부터 무역적자를 감수해왔는지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처사다. 사실 독일과 일본, 한국 등은 미국이라는 막강 패권에 힘을 실어주는 대가로 엄청난 통상이익을 구가해왔다. 그런데 미국이 어려워지면서 불균형한 무역구조를 바로잡자고 하니 이제 트럼프를 괴물 취급하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아니 트럼프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기득권 이중성 해소가 트럼피즘의 핵심…한국은 미국 민주당의 이중대인가?
트럼프가 뽑아든 칼은 국가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밥그릇만 생각하는 기득권 세력을 겨냥한다. 하던 대로 하는 것만이 능사인 무능하고 무책임한 관료 사회, 그 관료 사회와 짜고 전쟁 지원에 곳간을 탕진하는 민주당 행정부, 그런 민주당 정권을 정의로운 정치 세력으로 미화해온 미디어 등이 바로 트럼프가 증오하는 기득권 세력이다.
한국은, 정확히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이런 미국의 내막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진짜 고통이 뭔지, 그래서 동맹이 앞으로 어떻게 깊은 아픔을 치유할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피를 나눈 동맹(혈맹)이라는 점만 강조한다. 이런 파렴치함에는 여야, 좌우,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 미국 공화당 인맥은 거의 없고 오로지 관료 중심의 민주당 인맥만 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2일 오세훈 서울시장의 자체 핵무장 주장을 비판하며 “대한민국 외교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깨고 뭘 할 수 있을까. 오세훈 시장은 지금 피로 맺은 동맹을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돈과 힘을 앞세운 극단적 미국 우선주의”라고 맹비난했다. 유력한 미국 전문가인 그는 트럼프 정치의 본질을 ▲금권정치(plutocracy) ▲반민주주의(autocracy)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 ▲족벌정치(cronyism, nepotism)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로 정의했다.
궁극적으로 자국이익 꾀하는 게 대통령의 직분
한국인, 특히 지식인들은 트럼프에게 “자국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대통령이 자국의 이익 만을 꾀한다고 욕을 먹는 것이다. 통상 모든 나라의 대통령은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호혜적이든 배타적이든,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꾀한다. 그런데 트럼프만 유독 나쁜 놈으로 치부된다. 단일 패권 미국에 익숙한 한국 지식인들의 당연한 관성인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트럼프 2기를 입체적이고 치밀하게 분석하기를 귀찮아 무심코 내뱉는 언사라면 얘기가 심각해진다.
트럼프 2기는 미국과 지구촌, 당연히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외교의 기본 개념부터 다시 설정하자는 목소리가 이미 높다. 이대식 사단법인 유라시아21 회장은 10일 국회 세미나에서 “트럼프 2기를 맞아 한국은 ‘명확한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상대의 말을 명확히 들어주되, 이행은 최대한 질질 끄는 것”으로 ‘명확한 전략적 모호성’을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특히 “어느 누구에게도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절대 들을 수 없다. 이것을 포기하라고 하면 말을 듣지 않겠다라는 ‘핵심 이익’을 명확히 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명확한 전략적 모호성’의 요체라는 설명이다.
‘지지’와 ‘반대’ 알고리즘 만으로 생존 어려워
트럼프와 트럼프 시대의 특성을 정확히 알자는 말이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말로 곡해되면 곤란하다. 국가와 외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곡해가 나온다.
만일 우주 공간에서 유성이 한반도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대로 두면 한국 어디에 떨어져도 한국인 1만 명이 유성의 충돌 충격 때문에 사망한다. 그런데 막강한 현무 미사일로 높은 고도에서 유성을 요격하면, 그 유성이 일본에 떨어져 1000만 명의 일본인들이 죽는다. 한국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다른 선택지가 없는 닫힌 가정이라면, 한국 대통령의 선택은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1만 명의 한국인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이 얘기는 한 국가의 이익이 다른 국가의 이익을 위해 침해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제한된 선택 앞에서는 다른 국민을 우리나라 국민과 똑같은 보편적 인류로 여길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을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대외 갈등 국면에서, 외국인을 같은 인류로 보는 것은 위험할 뿐더러 불가능하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나를 죽일 사자나 호랑이, 뱀과 마주한 경우와 마찬가지다. 누구도 사자, 호랑이, 뱀에게 ‘규칙 기반의 질서와 태도’를 강요할 수 없다.
트럼프는 80년 지속돼온 ‘서방만을 위한 규칙기반의 세계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여전히 정글인 지구촌에서 트럼프가 한국인과 같은 인류일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이 맹수가 한국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인이 피난 또는 탈출할 벌목작업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맹수의 행위가 나를 위한 것인지와 무관하게, 나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활용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모든 수입산 철강 알루미늄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한3월12일을 하루 앞둔 11일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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