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6.11 14:31러시아의 대표적인 한국 전문가가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 직후 “서울의 혼란 속에서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러시아 유명 매체에 기고했다.
콘스탄틴 아스몰로프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중국・현대아시아연구소 한국학센터 선임연구원은 지난 6일 <러시아투데이(RT)>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재명은 한때 포퓰리즘 슬로건과 기본소득과 같은 아이디어로 스스로를 ‘한국의 버니 샌더스’라고 불렀다”며 이 같이 밝혔다. 그는 기고문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을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 스타일(사회민주주의)로 표방해왔지만,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는 고유의 태도를 바꿔 승리했다”고 분석했다.
“이재명은 같은 당의 공격을 받은 정치인”
아스몰로프 연구원은 다만 “그의 측근들은 이제 화려한 스타일과 독특한 평판을 공유하기 때문에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라는 용어를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재명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문재인 전임 대통령 재임 시절 당내 비주류 세력을 이끌었고, 문재인 대통령보다 더 좌파적 포퓰리스트로 여겨졌다”며 “문재인은 이재명을 위험한 경쟁자로 간주, 일련의 형사 소송을 통해 제거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은 그러나 일련의 공격을 막아내고 결국 문재인의 모든 측근들을 경선에서 패배시킨 뒤 2022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고 덧붙였다.
아스몰로프 연구원은 6월3일 치러진 조기 대통령선거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시도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국정 운영이 제한되자 상황을 타파하려고 계엄령을 선포한 행위를 “윤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려 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국민은 이를 군사독재로의 복귀로 여겼고, 예상대로 실패로 끝났다”고 덧붙였다.
윤석열의 계엄령이 ‘쾌도난마’의 결단이었나?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아르게아스 왕조 제26대 군주 알렉산더 대왕이 칼로 잘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매듭이다. 흔히 ‘과감하게 대담한 방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문제’ 또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문제’라는 의미로 쓰인다.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매듭이 달린 고르디우스의 전차가 있었다. 이곳 정가에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그 매듭을 풀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는 이 지역을 지나가던 중 그 얘기를 듣고 칼로 매듭을 끊어버렸다. 아스몰로프 연구원은 파면된 윤석열의 계엄령 시도를 알렉산더의 오래된 ‘쾌도난마’ 고사에 견준 것이다.
그는 윤석열의 파면 배경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복위시키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여러 쟁점에도 불구하고 오랜 숙고 끝에 만장일치로 대통령 탄핵을 선고했다”고 해석했다.
아스몰로프 연구원의 표현은 외국인, 특히 법학자가 아닌 외교안보 전문가의 눈에 윤 대통령 파면 장면이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헌법과 실정법들에 내재된 법리에 따른 결정이긴 하지만, ‘나라의 혼란을 막기 위한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결정’으로 읽힌 것이다.
주권국이 스스로 내린 결정…’정치’ 배경 있지만 ‘법치’가 핵심
아스몰로프 연구원의 판단과 별개로,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실체적 요건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계엄 선포 당시 정치 상황과 사회 상황이 전시·사변에 해당한다거나 적과 교전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 핵심이다. 재판부는 또 반드시 문서로 된 비상계엄 선포문에 국무위원들이 서명하지 않은 점, 계엄 선포 당시 시행일시・시행지역・계엄사령관 등을 공고하지 않은 점, 계엄 선포 후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지 않은 점 등 비상계엄 선포의 절차적 요건을 맞추지 못했다고도 판단했다. 결국 계엄 선포의 실체적·절차적 요건을 모두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는 헌재가 국회에 군경을 투입해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권을 방해한 혐의와 함께 대의민주주의, 권력분립원칙, 국군통수의무를 모두 위반하고 국회의원의 헌법상 권한과 정당의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한 핵심 법리다. 아울러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행위가 ▲지방자치의 본질적 내용 침해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위반 ▲포고령을 통한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 침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침해 ▲정당의 자유, 단체행동권, 직업의 자유, 신체의 자유 침해 ▲영장주의 위반 등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상대국의 정체성을 자주 경시한다
특정 주권국 법령에 따른 자국 사법부의 재판 결과를 정치적 배경에 근거해 해석하는 것은 비단 아스몰로프 연구원만의 오류나 편향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다른 나라의 정세를 분석할 때 쉽게 이런 오류에 빠진다. 특정 주권국가는 나름의 법령과 민주주의 알고리즘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름이 알려진 법적 지도자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이런 법령과 알고리즘이 사후적으로 추인한다고 보는 편향이 사뭇 강하다. 타국의 외교・안보 현상을 해당 국가 지도자의 열패감이나 경쟁심, 질투심 등 개인적 감정으로부터 해석하는 분석과 논평이 난무한다.
물론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 근거 자체에 ‘법적 안정성’ 같은 정치적 고려가 일부 명문화 돼 있다. 특히 4개월 동안 이뤄진 헌법재판소의 심리 과정을 놓고 많은 예측과 해석이 분분했다.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내부에서 많은 진통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더라도 모든 법리는 실정법과 판례에 근거해야 한다. ‘법치적’ 판단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정치적’ 해석은 정당성을 부여받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아스몰로프 연구원이 한국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라는 추상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은 주권국가의 법치 시스템과 알고리즘을 가볍게 본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상대의 역사와 처지, 맥락에서 출발해야
아스몰로프 연구원이 한국의 새 대통령 이재명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나 샌더스 상원의원에 견준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묘사하려는 대상을 고도로 추상화 해야 하는 연구자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에서 국가 지도자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다. 먼저 국제사회에서의 지위와 국가의 시스템, 그런 배경에서 형성된 사회 심리 등 모든 면에서 공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작전권을 비롯해 스스로 외교・안보정책을 결정하고 구현하기 힘든 나라의 정치 지도자를 세계 최고의 패권 추구 국가 정치지도자와 견주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을 ‘희화화’ 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스스로를 ‘오롯이’ 국익을 위한 실용적 판단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강조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을 러시아 정치지도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견준다면, 아스몰로프 연구원은 동의할 수 있을까? 전시작전권은 물론이고 군사훈련을 포함한 평시작전권조차 마음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의 정치지도자를 몇몇 이미지로 강대국 정치 지도자에 견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차제에 아스몰로프 연구원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외교・안보 전문가들도 정확히 상대방 입장에서 논리적인 이해관계에 입각한 정세 분석을 기대한다.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을 땐 해당 피사체의 본질과 진화의 역사를 먼저 살피는 것이 연구자의 본분이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일 트럼프 대통령과 당선 후 첫 전화 정상회담을 했다.
소통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