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5.09 12:20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한국 예술가들에 의해 뮤지컬로 각색됐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를 다룬 몇몇 칼럼에서는 대체로 ‘도덕’과 ‘욕망’을 대비시킨다. 하지만 ‘도덕’도 ‘욕망’도 모두 ‘쾌락주의(hedonism)’의 범주 안에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 여겨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 원리로 삼는 게 ‘쾌락주의’이다. 헌법상 ‘행복 추구권’이나 형법상 ‘정당방위’도 ‘쾌락주의’와 인연이 있을 것 같다.
쾌락을 육체적인 것(욕망)만으로 보는가, 정신적인 것(도덕)으로 보는가에 따라 구분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달리 볼 수 없다. 다만 ‘자기만의 쾌락’일 경우 이기적 ‘욕망’에 가깝게 보일 것이며, ‘많은 사람의 쾌락(공리주의)’은 ‘도덕’의 명분과 동반된 ‘고급 쾌락’으로 간주된다.
괴테의 <파우스트>식의 영혼 담보부 쾌락 대출
작품 속 촉망받는 화가 배질은 영국 런던 사교계의 귀족 청년 도리안 그레이에게 완전히 반한다. 도리안은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순수하고 겸손했다. 교양과 완벽한 외모까지 갖췄다. 배질은 도리안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어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는 도리안의 맑은 영혼이 아름답고 젊은 육체의 이미지와 영원히 조응할 것으로 믿었다.
반면 젊은 날 철저한 금욕 생활로 사회 지도층이 된 헨리는 젊고 아름다운 도리안을 통해 ‘쾌락주의’를 구현, 대리 만족을 추구한다. 배질은 도리안에게 ‘정신적인 쾌락’과 ‘많은 사람의 쾌락’을 중시하는 동성 연인으로, 헨리는 도덕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만의 쾌락’을 쫓는 진솔한 삶의 대변자로 각각 도리안의 인생을 채워간다.
배질의 바람과 달리, 도리안은 헨리가 바라는 대로 젊음과 아름다움을 앞세워 모든 육체적 욕망을 채워나간다. 파우스트(괴테)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리안은 젊은 육체를 보존하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잡힌다. 순수한 사랑이 실패하고 방황하며 타락해 간다. 헨리의 ‘이기적 쾌락주의’는 도리안으로 하여금 육체적 탐욕을 합리화 시켜줬다. 거리낄 것 없이 본능에 충실한 삶만을 추구한다.
어느날 도리안은 배질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가 점점 흉측하게 변해가는 걸 발견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타락한 삶을 뉘우치게 된 도리안은 초상화를 칼로 찢는다. 그러자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운 젊음으로 복원됐지만, 정작 도리안 자신은 수십 년 간의 노화가 순식간에 진행돼 곧바로 최후를 맞는다.
이기적・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비하하는 이중성
뮤지컬 작품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두 종류의 쾌락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무릇 사람들이 악마와 ‘영혼 담보부 젊음 대출’ 계약을 맺을 기회가 있다면 아마도 막상 서명할 때 망설일 것이다. 다만 영혼을 담보로 잡히더라도 젊음과 풍요를 만끽하고 온갖 욕망을 다 채울 수 있음을 완벽히 기대한다면, 주저 없이 도리안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욕망을 마음껏 채우는 도리안 대신 도리안을 먼 발치에서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배질에게 더 큰 공감의 시선을 보낸다. 어떻게든 욕망을 충족시켜 쾌락을 얻는 도리안을 이해하지만, 그의 선택에 마냥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리안의 쾌락은 도리안만의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욕망까지 채워나가는 도리안에 대해 적잖은 질투감을 느낀다. 따라서 도리안이 느꼈던 죄책감과 고뇌를 더더욱 공감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제 300여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극 종료 후 배우들의 감사 인사 때 그런 속내를 드러냈다. 마지막 순간 피 끓는 절규로 부질 없는 욕망과 육체적 쾌락을 참회했던 주인공 도리안에게 보내는 박수 소리가 배질, 헨리에 대한 것들보다 훨씬 작았다. 어떤 쪽이든 ‘쾌락주의’에 진심인 한국인들이지만, 자기만을 위한 육체적 ‘쾌락주의’를 실제로 누린 도리안에 대해서는 반감을 보였다. 사실 ‘질투심’일 가능성이 높다.
푸틴, 집권 25년 만에 쾌락주의를 논하다
관객들처럼, 무릇 사람들은 ’정신적 쾌락’과 ‘많은 사람의 쾌락’을 ‘육체적 욕망’과 ‘이기적 쾌락’보다 중시한다고 여긴다. 실제 이기적・육체적 쾌락을 충족할 수 있었던 도리안에 대한 ‘질투심’을 감추려는 ‘심리적 자아보호’ 기능의 일환이다. ‘육체적 쾌락’을 ‘정신적 쾌락’의 하위에 두는 ‘자기 암시’를 통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자아를 용서하는 심리적 알고리즘. 사실 이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유럽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랜 세월 오스카 와일드의 이 원작 소설을 읽고 음미하면서 연극, 뮤지컬로도 자주 감상해왔다고 한다. ‘쾌락주의’를 여러 각도에서 곱씹어 보고 토론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유럽인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러시아 사람들 역시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 친숙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몸소 실험했던 러시아 사람들에게 ‘정신적 쾌락주의’와 ‘물질적 쾌락주의’의 심연을 논하는 것은 꽤 중요해 보인다. 러시아 인민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고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일(모스크바 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집권 25년을 그린 <러시아, 크렘린, 푸틴, 25년>이라는 다큐멘타리 영화가 한국의 <한국방송(KBS)>격인 <러시아 1 TV 채널>에서 방영됐다. 푸틴 대통령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공익을 위한’, ‘정신적 쾌락’이 인류가 추구할 ‘영원한’ 가치라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그는 “서양 문화의 핵심인 가톨릭과 개신교 문화에서는 영적인 것들도 존재하지만 물질적 복지가 항상 우선시 되고, 물질적 성공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인은 서구 사회와 몇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우리는 영원한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구의 공익을 사익화 하려는 세력들
푸틴 대통령이 말한 ‘영원한 것’은 러시아인의 정체성,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를 가리킨다. 푸틴은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쾌락주의의 얼개로 볼 때, 푸틴이 말하는 러시아의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는 ‘많은 사람의 쾌락’을 꾀하는 ‘정신적 쾌락’이 분명해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 사회는 러시아로부터 무언가를 뜯어내 어떻게든 러시아를 정복하고 더 복종적으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욕망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서방에 궁극적으로 맞서는 유일한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욕망의 대상인 물질보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러시아인들의 ‘반(反)제국주의’는 집단적 숙명이다.
자본주의의 씨앗을 규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적 탐욕’을 중세의 위선과 억압으로부터 구해냈다. 200년 가까이 그 씨앗이 자라 이제 인간의 ‘이기적 탐욕’을 죄악시 하는 사람들은 찾아 보기 힘들다. 자본주의는 비록 상처와 오욕을 수반하지만 인류 역사의 주류(Legacy) 시스템이 됐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시대부터 면죄부를 받은 ‘이기적 탐욕’은 차츰 자신의 숙주에서 공생하는 인간의 뇌에서 ‘많은 사람의 쾌락을 꾀하는 지적・도덕적 욕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민족이나 국가 같은 공동체 범주들을 깡그리 무시한 지구 권역의 ‘정부 안의 정부(deep states)’는 각국 정부 내각과 미디어, 국제기구를 장악해 에너지와 곡물, 무기 매매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지구촌 인민들은 이런 시스템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가 품고 있는 반나치즘과 인류애 등의 전통적 가치를 잊도록 강요받고 있다. 저들의 이익을 위해 ‘가족’이나 ‘공동체’, ‘인류’와 같은 영원한 가치 또한 함께 인식의 뒤로 밀려나고 있다.
(사진=모티브 히어로 제공) 영원한 젊음을 위해 영혼을 판 도리안 그레이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만큼 자신의 초상화는 핏빛으로 일그러졌다.
소통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