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6.24 12:26모두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차라리 미국의 단일패권이 공고했을 때는 미국이 스스로 원하는 크기만큼만 전쟁을 하면 됐다. 하지만 미국의 힘이 빠지자 미국은 동맹국들을 총동원, 크고 작은 대리전으로 공동체 전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세계대전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라는 표현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런 표현을 자주 쓰던 사람들이 인간이 어디까지 뻔뻔스러울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규칙’과 ‘힘’에 기반한 세계 질서는 원래 지구촌 공동체 거버넌스의 본질이었다. ‘규칙’과 ‘힘’은 서로를 길항하면서 지구촌을 지탱해왔다. 그런데 규칙은 신뢰 없이 작동할 수 없다. ‘아전인수’, ‘내로남불’ 식으로 규칙을 운용, 신뢰를 대거 잃었다. 신뢰 잃은 지구촌에 ‘힘’의 원리가 득세하고 있다.
러시아 약화에 실패한 집단서방…중국, 브릭스 약화 위해 전쟁 일으켜
브라질 출신 저널리스트인 페페 에스코바르는 “이란에 대한 ‘집단 서방(collective western)’의 공격은 무엇보다도 브릭스 에너지 핵심에 대한 선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란이 중국, 러시아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 점을 짚었다. 러시아는 러시아-중앙아시아-이란-인도를 잇는 국제남북교통회랑(INSTC) 무역로를 개척 중이다. 무역로가 자리를 잡으면 이란과 인도의 불편한 관계도 크게 개선될 예정이었다.
이란이 중국과 긴밀한 공급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약화시키기’에 집중하고 있는 미국이 이번 이스라엘-이란 분쟁의 배경이라는 데 별다른 이견은 없다. 에스코바르는 “유라시아 경제의 연결성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서아시아에서 참혹한 전쟁을 벌여 이란을 몰락시키려는 것은 유라시아 통합 강화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쇄 살인범은 외교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이란 지도부의 안일함과 허장성세에 대한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정보부대 모사드가 초격차 역량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이란이 보여주는 모습이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 없다는 지적이다. 현 페제시키안 대통령 주변에는 서방과 융화될 수 있다는 믿음에 빠진 사람이 많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에스코바르의 분석에 따르면, 이란은 오만에서 열린 미국과의 핵 협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란의 지도부는 물론 민간인과 군부 모두 대화로 자신들의 미래가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결과를 애당초 노정했다는 지적이다. 에스코바르는 “연쇄 살인범은 외교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거짓된 안전감에 빠졌다”고 이란 지도부를 비판했다.
이란은 혁명수비대(IRGC) 지도부 다수가 잇따라 암살될 때마다 현란하고 거친 수식어를 써가면서 분노와 응징을 예고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화로 해결하는 쪽을 택해온 게 사실이다. 이번에 이스라엘방위군(IDF) 공군기가 테헤란을 폭격하자 이란은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니지만, 전쟁을 끝내는 것은 우리가 될 것”이라며 강한 응전 메시지를 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에 대해 “공격을 멈추면 우리도 멈추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공격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이란과 이슬람 범시아파 내부의 주도권 다툼은 항상 적들에게 큰 구멍을 제공한다. 라이시 전 대통령과 전 외무장관이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 추락해 사망했지만, 이 역시 이란 내부의 정치 투쟁의 산물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무릇 경쟁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유능한 적’보다 단 한 뼘이라도 더 앞서야 승리할 수 있는 고된 여정이다. 그런데 적전 분열은 기본이고, 적이 선한 의지를 가졌다고 믿는 어리석음으로 적에게 허장성세만 부린다고 승리할 수 있을까. 외교 또한 잠재적 적들과의 총성 없는 전쟁이다.
힘이 전제되지 않는 한, 어떤 공동체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란 뿐 아니라 지구촌 모든 나라의 권력자와 민중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불편한 진실’은 불편하기 때문에 잊고 싶어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은 잊고 싶은 것을 잊는다. 무엇을 잊고 싶고, 무엇을 믿고 싶은가. 진저리 칠 정도로 잊고 싶은 최악의 기억을 잊고 싶고, 최악의 상황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심리학보다 세계를 더 객관적으로, 더 정확히 설명하는 도구는 물리학이다. 세계는 인간이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무관하게 사물의 이치대로 굴러간다. 사물의 이치는 규범이나 신앙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개별 사물 고유의 알고리즘과 사물과 사물 간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니 인간이 꺼리는 최악의 상황도 올 수 있다. 우연이 필연화 되고, 하나의 결과가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 자연, 사회, 인문 모든 분야에서 공히 그러하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힘(무력 포함)이 아니라 이성과 이타심, 포용, 배려가 인간 사회를 구동시키고 지탱하게 하는 알고리즘의 핵심 코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약자들이 보편적으로 갖곤 하는 ‘희망적 사고’다. 반면 공동체의 목표를 수립하고 관철시켜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은 인지력과 물리력을 아우르는 힘만이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고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드러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류가 더이상 국경을 초월한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인권과 정의를 내세우지만, 인권의 대상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거주자, 동유럽 돈바스 지역 주민들이라면 결코 같은 잣대로 취급 받지 못한다. 미국 전문가인 서정건 교수(경희대)는 미국과 앵글로색슨족의 정치사상적 근간이 ‘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 바 있다. 특정 인종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인권과 정의는 그들 이외의 인종을 절대로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신뢰를 잃은 인간사회, ‘약육강식’ 이외의 대안이 있나?
지구촌 공동체에서 특정 인종에 의해 ‘동일한 인류’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의 생존 철학은 무엇이 돼야 할까. 적잖은 지식인들이 다시 ‘힘’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 스스로가 자연사적 발전 과정을 공유하는 만큼, 인간이 인간 이외의 동물들과 구분되는 특성 중 하나인 윤리의식이 ‘인종주의’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의미다.
러시아 매체 <스푸트니크>와 <RT>의 공동편집장인 마르가리타 시모니얀은 이런 맥락에서 최근 “어떤 인도주의적 문신이 새겨지든, 세계사 발전의 본질은 불변하며 ‘더 강한 자가 옳다’는 가장 단순한 원칙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오늘날 무력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무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무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찬성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덧붙였다.
티모페이 보르다체프 러시아 고등경제대학교 교수(정치학 박사)는 최근 러시아 외교・안보 싱크탱크 ‘발다이클럽’에 기고한 칼럼에서 “더 이상 세계에는 다른 나라에 자신의 정의관을 강요할 수 있는 국가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는 “전통적 국제기구의 현저한 약화와 함께 그 목표, 과제, 활동이 재고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유럽의 전략적 쇠퇴는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중국・인도가 새 국제 질서 구축?…전혀 새로운 질서가 오고 있다
보르다체프 교수가 “국제 질서는 무엇보다 다른 국가들이 게임의 규칙을 따르도록 무력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는 국가들의 통치 도구”라고 정의한 점이 유독 눈에 띈다. 그는 특히 “이전의 모든 국제 질서는 서구 내부 갈등의 산물이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서구는 미국과 유럽연합에 일본과 한국 등까지 포함시킨 ‘집단 서방’을 의미한다. 서구의 중심인 미국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패권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구촌이 채택해온 국제 질서는 사실상 미국이 이뤄놓은 것이다. 독일과 일본이 군국주의의 발톱을 내세우며 세계를 식민화 하려고 시도했지만, 러시아(소련)와 미국이 적잖은 희생으로 제압했고, 유엔 체제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이해관계 아래 복속됐다. 미국의 배타적 패권 행사에 제동을 건 러시아는 주기적으로 지구촌 도처의 갈등에 개입했다. 유엔 체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는 당초 서방 내부 갈등에 러시아가 참여한 결과일 뿐이라는 게 보르다체프 교수의 결론이다.
보르다체프 교수는 “서구가 제안한 국제 질서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고, 누구도 동일한 목표와 동일한 비용을 감수할 의지를 가진 새로운 질서를 서둘러 만들지 않는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특히 “중국이나 인도 같은 현대 강국들이 새로운 국제 질서 구축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큰 착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국제 질서라고 부를 만한 어떤 균형이 점차 형성될 것이며, 이는 이전 질서들과 거의 공통점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아미르 사이드 이라바니 유엔 주재 이란 대사가 지난 20일(뉴욕 현지시간)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갈등에 관해 연설하면서 이스라엘의 민간인 지역 폭격에 희생된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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