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7.24 15:37“종전 시한을 50일 이내라고 말한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시한은 매우 이상해요. 우크라이나에게 협상을 재개하라고 촉구하지 않았잖아요. 트럼프 대통령이 무기 문제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넘기기로 한 결정은 유럽 동맹국들이 평화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죠.”
러시아 외무부 부국장 그루슈코가 15일(모스크바 현지시간, 이하 각지 현지시간)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러시아 고위 관료들이 최근 유럽의 심상찮은 반러 움직임에 잇따라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이날 “워싱턴과 나토에서 내려지는 결정은 우크라이나에게 평화를 위한 신호가 아니라 전쟁을 계속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화를 보고 싶어하는 반면, 유럽은 평화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작전의 악화를 보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반러시아 정책에 몰두하는 유럽
드러나는 현상만 보면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함께 대러 제재를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또 EU는 18일 러시아 에너지 가격 상한을 낮추고 러시아 은행들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한편 러시아 개인과 법인에 대한 50개 이상의 경제 제재를 담은 18차 러시아 제재안을 발표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은 이참에 패트리엇 미사일과 러시아 본토 타격이 가능한 장거리 미사일을 더 갖추고, EU군을 우크라이나에 주둔하겠다고 큰 소리를 친다.
러시아 인접 몰도바에서 자치권을 주장해온 친러 성향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으름장도 놓고 있다.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은 14일 나토가 러시아와의 무력 충돌 가능성에 대비, 몰도바를 적극 활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EU가 우크라이나로 러시아 군대가 진격하는 상황을 고려, 몰도바를 동부 전선에서 나토의 전진 기지로 전환하는 결정이 임박했다는 첩보였다.
서방 언론들도 일제히 대러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이에 나눈 전화 통화 내용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타격하라’고 우크라이나에 촉구했다”면서 "이는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와의 대화에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공격을 촉구하지 않았다”고 <파이낸셜타임스> 등 보도를 공식 부인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에게 왜 모스크바를 공격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젤렌스키는 무기를 요청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트럼프 의도는 유럽 돕는 게 아니라 무기 장사
대러 제재 전선에 미국과 유럽이 한 목소리를 내는 듯하지만 정작 러시아는 별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모양새다. 오히려 미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방침은 ‘자체 재무장’을 꿈꾸는 유럽을 실망시켰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리 부의장은 이날 트럼프의 무기 지원 방침 발표에 대해 “극적인 최후통첩으로, 호전적인 유럽을 실망시켰다”고 논평했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분쟁에 대한 합의가 앞으로 50일 안에 이뤄지지 않으면 미국은 러시아에 100%의 2차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크렘린궁에 극적인 최후 통첩을 내렸다”고 표현했다.
다만 “전 세계는 그 결과를 예상하며 몸서리쳤지만, 호전적인 유럽은 실망했고, 러시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밝혔다.미로슈니크 러시아 외교부 특별대사는 15일 솔로비예프 라이브 TV 채널 방송에 출연,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미국이 유럽의 무기 자금 흐름을 미국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미국의 입장이 바뀐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정권을 계속 통제하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 상업적 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유럽의 자체 재무장을 위한 자금 흐름을 미국으로 돌려 무기 판매 수입을 늘릴 기회로 삼고 있다는 인식이다. 즉,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유럽은 자체 재무장의 기회로 삼으려 하고, 미국은 종전 협정 등 평화에는 소극적인 입장일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분열된 나토…적대적 조치에도 별 긴장하지 않는 러시아
러시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무기 제공 발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트럼프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고, 나토 회원국들인 유럽연합이 한 목소리를 낼 형편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이 자체 군수산업을 일으켜 군사적 패권 부활을 꾀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 착안, 미국 무기를 최대한 팔 기회로 삼고자 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은 이미 독일이 기존 합의된 것보다 두 배 더 많은 방공 시스템을 구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은 유럽 국가들에 무기를 대량으로 판매하면 유럽 국가들이 이를 우크라이나에 전달하고, 미국은 새 무기로 재고를 보충하는 방식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체코, 헝가리는 사실상 미국 무기 공동구매 계획인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G7 국가다. 나토 신참인 스웨덴과 트럼프 대통령의 아이슬란드 위협을 받고 있는 덴마크가 무기 계획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다. 18차 러시아 제재안도 슬로바키아와 몰타가 반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무기 공급에 지연이 발생하고 있어 우크라이나로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전망도 전면적 무기 공급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유럽의 날선 대러 위협과 별도로 “다른 거래가 지연돼 미국 무기가 나토를 거쳐 우크라이나로 공급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 정치 지도자들의 표정 관리가 쉽지 않은 시절이다.
(사진=AFP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은 18일(브뤼셀 현지시간) 러시아에 대한 제 18차 제재안을 합의, 가결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6월10일 브뤼셀 EU 본부에서 러시아에 대한 18차 제재 패키지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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