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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탐구의 심성과 준수의 심성 4. 동아시아의 변화: 명-청의 등장, 조선의 건국,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전문위원 권희영

    2024.01.29 09:30
    제1부   탐구의 심성과  준수의 심성   4. 동아시아의 변화: 명-청의 등장, 조선의 건국,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글로벌 교역의 등장: 유럽과 동아시아

    유럽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하여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밟을 때 동아시아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몽골의 평화(pax mongolica)를 유지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국제적 교역을 가능하게 했던 몽골 제국은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유럽과 아시아 대륙간의 교역은 위축되었다. 유럽이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해상의 길을 개척하였지만 동아시아는 대개 자족적 내지는 고립적 노선을 선택하였다. 


    폐쇄된 제국 명의 등장

      몽골이 지배하는 원 말기에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들을 홍군이라 하였다. 빈농 출신의 주원장은 홍군에 참여하여 지도자가 되어 오왕의 지위까지 얻었다. 1367년 그는 황제가 되고자 하여, 상제의 명을 받아 백성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는 제국의 이름을 명교(마니교)에서 따와 대명으로 하였다. 명왕출세라는 전설을 활용한 것이었다. 1368년 그는 황제가 되었는데, 반란의 정신을 뿌리뽑으려고, 폐쇄, 감시, 공포스러운 처벌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한 생각으로 탄생한 것이 대명률이었다. 황제는 권력을 황제 1인으로 귀속시키고 정권과 군권 그리고 감찰권을 직접 장악하였다. 
      주원장은 1387년 요동의 평정 이후에는 대외적 팽창을 중지하였다. 주변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정복하는 대신 위엄을 과시하는 정책을 취했다. 조선과 일본, 유구, 기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부전의 정책을 수립하였다. 정허의 원정이 이를 잘 보여주었다. 명의 함대는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지만, 무역로를 유지하고 국익을 추구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며, 명의 위엄을 떨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리하여, 동남아의 무역로는 유럽과 일본의 무대가 되었다. 명은 글로벌 교역에 참여하기 보다는 중화 체제의 조공무역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는 폐쇄된 제국의 건설로 귀착되었다. 명은 세계의 존재를 미처 알지 못하였다. 해양을 통하여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명은 이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몽골 제국이 추구하고 유지하던 유라시아적 지평은 원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유라시아 대륙은 여러 나라들로 해체되면서 육로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을 이어주는 무역로는 오직 바다의 실크로드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정허의 원정 이후 중지되면서 명은 동아시아에 스스로 자폐한 것이나 다름없는 정책을 펼쳤다. 

    청의 등장과 러시아의 동진

      17세기 중엽 청이 명을 멸하고 중원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글로벌 시장에 대한 태도에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청은 이제 해양 뿐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의 육로를 통하여 동아시아까지 진출하게된 러시아를 상대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17세기에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1637년에는 오호츠크해에 도달하였다. 1643년 이후에는 카자크 기병대로 시베리아의 정복을 시작하였다. 네르친스크에 전진기지를 만들고 1665년에는 알바진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이어서 아무르 강의 퉁구스 추장 간티무르(Ghantimur)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러시아 귀족이 되었다. 서부 몽고족의 중가르 족도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가 이루어졌다. 시베리아로 깊이 진출하게 된 러시아는 이제 청과 교역을 하고자 하였다. 알렉세이 황제는 1656년 바이코프를 사신으로 보내 청과 교역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신은 삼궤구고두를 거부하여 황제를 배알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청이 모든 교섭은 조공의 형식을 통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도 시베리아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1686년 러시아는 골로빈 공사를 네르친스크로 파견하였다. 청도 군병 천, 군함 90척을 끌고 네르친스크에 도착하였다. 양 진영 사이에서 제수이트 신부 페레이라와 제르비용이 양 측을 왕래하며 양 국의 사이의 조약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였다. 부본은 만주어, 몽골어,러시아어로 작성되었다. 청은 최초로 외국과 동등한 지위에 입각한 조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청과 통상을 유지하였다. 중가르족과 서부 몽고족에 대해 러시아가 중립을 지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양국은 1727년에 캬흐타 조약을 통하여 청-러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캬흐타에서 교역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청은 가능한 한 러시아와의 접촉을 제한하려 하였다. 

    일본의  실용주의: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태도

      1600년에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 1564-1620.5.26)가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12살에 상선을 건조하는 견습을 시작하였고 24살에는 영국 해군에 보급을 담당하는 수송선의 선장이 된 항해사였다.그는 바바리(Barbary) 상선사의 항해사와 선장이 되었다. 1598년 애덤스는 리프데(Liefde)호를 타고 로테르담 항을 떠나 극동으로 항해하던 중 쿠로시마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 때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덤스와 생존자들을 오사카로 불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 종교, 기술적 주제를 가지고 애덤스를 심문하였다. 그는 애덤스의 지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선박과 선박 건조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영국인 애덤스로부터 기하와 수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자신의 가신인 하타모토로 기용하여 에도의 남쪽 미우라 반도에 영지를 하사하였다. 애덤스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여인과 혼인하여 미우라 안진(항해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통역 겸 고문으로 삼았다. 서양식의 선박의 건조 감독의 일을 하게 하였고, 유럽의 상인들이 일본으로 오도록 격려하는 편지도 작성케 하였다. 그리하여 애덤스는 1613년에 큐슈 히라도에 동인도회사를 위한 영국 상관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 또한 1614-1619 연간에는 동남아시아를 항해하는 일을 맡았다. 이에야스는 1616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계승자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어느 정도 쇄국주의를 가지고 있어서 네덜란드에게만 통상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이후에는 애덤스의 영향력은 감소하였고, 그는 1620년 사망하였다. 여하튼 애덤스의 표착을 기회로 하여 일본은 1609년 홀란드와 무역을 시작하였으며 이  교역에는 영국인도 참여하였다. 일본은 기독교를 박해하였지만, 병학이나 의학 같은 부문에서는 적극적으로 유럽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 하였다. 17세기에 일시 쇄국을 하기도 하였으나 18세기에는 금령을 해제하고 서양서적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무사들은 유럽의 군사적 기술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유럽 선박 그리고 유럽 총포의 위력을 알고, 일본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또한 상업을 중시했던 일본은 이미 17세기에 대도시를 형성하였고, 상인과 기업가의 번영을 보았다. 일본의 부농은 그들의 부를 상공업에 투자하였다. 유럽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구조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청과 조선의 해양 정책

      청은 러시아의 동진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러시아에 대하여 조공의 원칙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해양을 통하여 동진하는 유럽 세력은 러시아 보다도 훨씬 더 큰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16세기 이후의 유럽인들은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그 이전과는 현저히 달랐다. 유럽의 국가들은 군주제와 의회제도를 결합하고 나아가서 국부라는 이익과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아시아에 대하여 현저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항해술, 총포, 전술, 그리고 산업상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바다에서 포로 무장하고, 나침반과 위도측정법을 가진 우수한 항해력을 가졌다. 18세기에는 크로노미터를 사용하여 경도측정법까지 확보하였다. 기동력과 화력에서 아시아의 배들은 유럽과 맞설 수 없었다. 
      유럽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글로벌 시장을 만들어나갈 때,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대륙의 명-청은 해양으로 진출하는 대신 자국의 연안을 보호하는 방어적 정책을 펼쳤다. 명-청과 조선은 이 점에서 거의 동일한 정책을 펼쳤다. 특히 청은 타이완을 근거지로 하여 동남아의 연해 지역을 사실상 장악한 정성공 세력을 제압하기 위하여 강력한 해금 정책을 펼쳤다. 1682년 강희제가 타이완을 평정하여서 해금을 완화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해금을 계속 유지하였다. 조선 역시 명-청의 정책을 따라서, 민간의 배가 연안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도록 하며, 나아가서는, 방어하기 힘들었던 도서의 주민들을 육지로 소개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연안 방어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청과의 조공무역도 육로를 활용하였다. 

    일본의 해양 정책

      명-청과 조선의 정책이 해금이라면, 일본은 그 반대로 해외 통상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유럽의 기술을 배우고 활용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과는 달리 무역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었다. 일본은 철과 은의 생산기술을 혁신하는 데 성공하였다. 철은 '간나시'(사철을 대량으로 파내는 방법. 강의 상류를 막아 하류 쪽으로 용수로를 끌어가는 방법. 사철이 퇴적된 철광산이 있으면 그 옆에 용수로를 만들고 그 용수로에 사철을 파서 던진다. 그러면 용수로의 급류 속에서 토사는 멀리 떠내려가고 무거운 사철만 바닥에 가라앉는데 그것을 퍼올려 대량으로 사철을 모을 수 있는 장법)라는 방법을 통하여 사철을 대량으로 얻어내고 이를 선철과 강괴로 구분하여 질좋은 철강을 생산해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16-17세기에 이루어진 이 기술을 사용하여 질좋은 무기, 농업과 수공업에서 필요한 농구와 제철 도구를 생산해낸 것이다. 또한 일본은 16세기 중엽에 조선에서 비밀리에 사용되는 회취법(은광석에 납을 섞어 태우면 납이 녹고 은도 함께 섞여서 굳어진다. 이를 함은연이라 하는데, 이를 재가 가득 담긴 철냄비에 담고, 석탄을 가득 채워 풍구로 공기를 불어넣어 태우면 산화납은 녹아서 재에 스며들고 은만 재 위에 뜨게 만드는 법)기술을 도입하여 은의 대량 생산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이 회취법을 알기 전인 16세기 중엽까지는 일본보다 조선의 은이 저렴하여 일본의 은광은 거의 폐쇄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회취법을 조선으로부터 알게 된 이후, 일본에서 폐쇄되었던 은광 개발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일본의 광산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7세기 초가 되자 일본의 은 수출은 1년에 20만 kg에 달하였다. 당시 세계 은 생산량의 1/3-1/4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 자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보다 적극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회취법은 조선에서는 1503년에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노 김검동이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1530년대에 곧바로 잠상(밀무역상인)에 의하여 기술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 들여온 회취법 기술로 인하여 일본은 글로벌 시장에 참여할 계기를 얻은 것이다.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인도양의 향료가 바다 실크로드의 주요 화물이었고, 은은 이 시장에서 주된 화폐가 되었기 때문이다. 명은 해금정책으로 시장 참여는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일본과 포르투갈 등의 유럽인들이 시장을 주도한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4곳의 항구를 대외 무역 창구로 개방하였다. 사쓰마는 유구, 나가사키는 네덜란드와 중국, 쓰시마는 조선, 마쓰마에는 북해도와 교역하는 창구로 유지하였다. 명이 해금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일본과는 감합무역(사신의 내왕에 사용되는 확인 표찰제도)을 통하여 국가적 차원의 교역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어서 '왜구'로 지칭되는 일본의 상업적 해상세력이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과는 달리 서양의 동아시아 진출을 일찌기 감지하였다. 
    ( 그림=Wikimedia Commons)










      


      

    전문위원 권희영

    1989-2021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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