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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탐구의 심성과 준수의 심성 5.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동아시아 외교

    전문위원 권희영

    2024.02.27 15:48
    제1부   탐구의 심성과  준수의 심성   5.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동아시아 외교

     원 나라 말기 고려의 상황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과 9차례나 전쟁을 하던 고려는 결국 몽골의 정복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몽골은 귀주와 서경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세워 통치하고(1258) 자비령 이북에는 동녕부를 설치하였다.(1270). 몽골에 저항하던 삼별초가 패배한 후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다(1273). 고려의 정치는 원의 세력에 기댄 권문세족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원의 쇠퇴를 기회로 하여 영토를 되찾고 권문세족의 횡포도 막으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결국 개혁에 실패하였고, 왜구와 홍건적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성리학의 수용과 신진사대부의 형성

      고려는 권문세족의 연합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광종 대에 왕권을 강화하고자 과거제를 도입하였다(958). 고려 말에 충선왕은 원의 관학인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성리학은 이기론과 화이론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유학적 정치 사상이었다. 안향과 이제현을 거쳐, 이색의 시대에 이르면, 성리학은 신진 관료의 입론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의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권근, 하륜 등을 중심으로 하여 신진사대부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원과 명이 각축을 벌일 때, 신진사대부는 명의 편에 서게 되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는 명이 중화가 되는 구도를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고려 말 무인의 등장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을 상대로 하여 이루어진 잦은 전투는 최영과 이성계 등 무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최영은 문신의 가문 출신이지만 무인의 길을 갔다. 양광도에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공민왕 원년에는 역모를 진압하여 호군이 되었다. 산동의 홍건적을 토벌하기도 하였고(1354), 이성계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기도 했다(1355). 원이 공민왕을 제거하려 고려를 침임했을 때 이를 막기도 했다(1364).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1374). 왜구가 삼남을 휩쓸었을 때는 논산의 홍산에서 적을 무찔러 철원부원군이 되었다(1376). 왜구가 개경까지 위협했을 때에도 역시 적을 섬멸하였다(1378).  이성계의 가문은 다루가치였다. 그의 고조부가 간도에서 거주할 때, 다루가치가 되었고 이후에 직책이 세습되었다. 부친 이자춘은 쌍성총관부의 만호였다. 이성계는 무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황산대첩에서는 왜구의 장수 아기발도를 화살로 죽였다. 공민왕 5년, 고려군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그는 이자춘과 같이 공민왕에 투항하여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이자 동북면상만로가 되었고(1356), 이후에도 전공을 세웠다. 홍건적이 20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임하여 개경이 함락되자, 고려인과 여진인으로 구성된 2천의 기병으로 수도 탈환작전을 벌였다(1361). 원의 나하추가 홍원 지방을 공격할 때는 동북면병마사의 자격으로 적을 막아 격퇴하였다(1362). 원의 기왕후가 최유를 시켜 공민왕을 몰아내려 할 때는 최영과 같이 이를 저지했다. 

    위화도 회군

      끊임없는 내란과 외침의 혼란 속에서 명장의 존재는 고려의 희망이었고, 왕실 역시 이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료 집단은 시대의 영웅인 최영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최영은 친원적 입장을 가졌고, 이성계는 친명적이었지만, 두 명장은 고려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그런데 1387년 명은 쌍성총관부를 지배하려고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지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최영을 팔도도통사, 이성계와 조민수를 부장으로 하여 우왕과 함께 정벌에 나섰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이소사대라는 사대적 논리와 함께 왜구의 상황, 부적절한 시기를 이유로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명령에 따라, 이성계와 조민수는 위화도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탈영병이 늘어나고 군의 사기도 떨어지고, 압록강의 물도 불어나 도하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 등은 회군을 요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성계는 결국 회군을 결정하였다. 회군 소식을 듣고 우왕은 개경으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이성계 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우왕은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웠다. 이어서 이성계는 전제개혁을 내세워 신진사대부를 지지 세력으로 삼고, 조민수를 유배시키고,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성계는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권문세가의 몰락과 신진사대부의 약진

      고려의 정권을 장악한 구 세력을 제거하고, 그의 세력인 신진사대부를 새로운 지배층으로 형성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 과정에서 가잔 핵심적인 것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함과 동시에 구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부수고 신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측근인 조준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여 전제개혁을 진행하였다(우왕14년, 1388). 전제개혁의 핵심은 나라의 통치기구를 담당하는 현직관료, 군인, 투화인, 지방의 관청, 관리와 직인, 차역되는 자 등 중앙에서 지방까지 통치 기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조준이 마련한 전제개혁안은 도당에서 논의되었다. 정도전은 찬성하였지만 시중인 이색은 반대하였다. 정몽주는 중립을 표했고 대다수는 반대를 표하였다. 그러나 유학 경서의 이상주의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은 끈질기게 개혁을 요청하였다. 공전제, 균전제, 십일세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지를 측량한 양전은 1389년 완료되었다. 이후, 급진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은 분급수조지는 경기에 한정하고, 사전의 몰수와 재분배를 주장하였고, 온건개혁을 주장하는 자들은  분급수조지의 경기 한정에 반대하였다. 이 대립 구도에서 사전개혁에 미온적인 창왕은 축출되고 공양왕이 옹립되었다(1389). 이듬 해, 전제개혁에 따라 과전절급 대상자들은 전적을 받았다. 과전법은 반포되었다(1391). 이성계와 그의 정권을 지탱해 줄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충성을 얻게 된 것이다. 

    사대교린의 외교

      조선의 건국은 원.명 교체라는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동아시아 대륙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는 것에 한반도 국가의 운명 또한 그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위화도 회군은 원에 대한 사대정책에서 명에 대한 사대정책으로 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이 건국된다는 것은 명에 조공을 하고 조선의 왕이 명의 책봉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 국가들과는 대등한 관계를 가지는 교린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교린의 관계를 가지는 국가는 사실상 일본에 불과하였다. 폐쇄적 해금정책을 써서 다른 외국과 적극적인 교역이나 외교를 가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명은 조선의 왕을 황제의 신하로 대하였고, 임의로 통제할 수 있었다. 조선은 통치의 이념으로 유학을 받아들였고, 유학을 시험하는 과거제를 통하여 구성된 관료는 사대교린의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교린의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무역을 중시하였기에, 명과 조선에 대해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일본에서는 아시카가씨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어 있었다.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1401년 명에 외교를 요청하였고 이에 명의 성조는 1403년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고 감합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공의 형식을 취했지만 일본의 쇼군은 일본 천황의 신하이기에, 일본과 명이 모두 체면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대명무역을 막부가 독점하는 것이었다. 한편, 1404년 7월, 조선과 일본은 국왕의 명으로 된 국서를 교환하여 외교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아시카가 요사모치(1388-1428) 때에는 황제국임을 보이기 위해 조선에 보내는 서계에 일본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삼강오륜의 문화

      조선의 문화에 가장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성리학을 통해 고착된 삼강오륜이라고 할 수 있다. 송대 성리학자들의 사상은 조선에 와서는 문화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특히 조선의 여성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삼강오륜을 강조하면서 "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으며, 이를 여성들에게까지 전파하려고 세종대에는 언해본까지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언해본에는 모두 35명의 열녀가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중에, 자살,피살,자살 시도, 자해를 한 인원이 무려 25인이나 되었다. 어려움을 인내하며 살아간 열녀는 5인에 불과했다.  조선에서는 죽음 이외에 열녀의 도를 실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언해본의 열녀 사례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남편이 천수를 누리고 죽었어도 아내가 따라 죽는 일이 빈번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조선의 유학

      고려말 받아들인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과 사상으로 숭배한 조선의 사대부는 공자를 성인으로 받들며, 송대 주희의 성리학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학문으로 간주하였다. 주자학적인 이상을 실현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사대의 대상인 중화(명)를 숭배한 나머지, 명에 절대적으로 복속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했던 것을 큰 은혜로 생각하여 청이 들어선 이후에도 명을 계속 기리려고 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의 명 숭배는 특별했다. 조선 초기의 정도전은 명대의 인재들은 중국 고대의 인재와 같다고 생각했다. 조선 중기의 장유(1587-1683)는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 선조의 시대를 "문명의 절정기"라고 하였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송시열은 조선이 "가장 문명한 세대"라고 하였다. 조선 말기에 가서야 조선 유학자들의 반성이 시작되었다. 정약용(1762-1683)은 주자학적 이해를 넘어서서 유학의 원형인 고학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고학 연구를 중시한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1666-1728)와 다자이 슌다이(1680-1747)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유학자들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은 헛된 것일 뿐, 조선의 유학 수준이 일본의 유학보다 뒤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일본의 유학

      일본은 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선과는 아주 판이한 태도를 취하였다. 일보에서 정주학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는 승려였던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와 그의 제자 하야시 란잔(1583-1657)이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세이카의 강의를 들은 바 있다. 그의 관심은 전국시대의 분위기를 교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과는 달리, 주자학에 대한 관심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곧, 야마가 소코(1622-1685)는 고학을 제창하며 주공과 공자를 연구하였다. 실천할 수 있는 도덕에 관심을 둔 것이다. 소코는 인간의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선한 행위로 간주하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미혹이며 따라서 인성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예악이라는 규범에서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이토 진사이(1627-1705)는 천명과 함께 인륜을 중시했다. 유교의 윤리를 성선론에서 구하고자 하였고, 예악의 역사적 변천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일본적 특성을 잘 발휘한 유학자는 오규 소라이(1666-1728)였다. 그는 18세기 초 고문사학을 주창하였다. 그는 개인 도덕을 정치적 결정에까지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정치적 사유의 우위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방법론적으로 고문사학을 주장하였다.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이 말이기에 옛 말을 바로 알아야 하며, 말의 개념과 역사적 연관성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도가 아닌 인간의 규범이 도였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백성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도리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에서 출발하였지만 정치를 발견한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실용적 입장을 가진 그는 다른 학파에 대해서도 관용을 취하였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도덕이 아니라 예악형정의 구체적인 실현이고 이를 윤리로 파악한 것이다. 그리하여 치국평천하가 이루어지는 것은 정치를 통해서라고 보았다. 그의 고문사학은 이후 일본 고증학의 기초를 열었다. 
    (그림=조선초 시전거리모습)

    전문위원 권희영

    1989-2021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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