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도응조
2024.03.17 15:15 한반도는 20세기 이래 미국과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세계사에서 세력 균형 또는 이퀄리브리엄의 패턴을 '제국이 이끈 역사'라고 인정하건 안 하건, 20세기 초중반 세계의 거대한 권력 집단이 가진 두 가지 이데올로기는 북한과 남한으로 사상적 뿌리를 내리면서 영향력을 구축했다. 서구 기독교 문명을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초로 한 공산주의가 그것이었다. 이렇듯 사상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영향력은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끌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적 관계'의 필연성을 혼란 속에서 이끌게 되었다. 사회학적 이해에 따르면 인간 삶에서 영원한 적은 없다.
역사적 패턴은 레이몽 아롱의 주장처럼 '제국에 의한 역사'(peace by empire)와 '법에 의한 역사'(peace by law)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다. 제국 간 대결이 어떤 선에서 정리되어 세력 균형이 이루어질 때, 비록 비밀스러운 전쟁이 막후에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평화의 무드에 진입했다. 이러한 평화의 무드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법에 의한 통제의 모습으로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아롱의 '법에 의한 평화'를 미어샤이머(John J. Mearsheimer)는 '제도(institution)에 의한 평화'라고 달리 표현했을 뿐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는 소위 UN, IMF, BIS, NATO 등등 어떤 법적 제도를 통해 자신의 영향권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세계 곳곳으로 확장하려 했다. 이러한 법 또는 제도적 통제에 묶여 있지 않았던 소련 영향권 국가들은 소련 영향권의 붕괴 이후 서구의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NATO의 확장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소련 붕괴 후 미국은 글로벌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법에 의한 평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권력의 모노폴리를 이루었다면 왜 세력 균형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국가들의 주권이 유지되어야 하는가? 주권 국가들의 엘리트들을 금융 영향력으로 장악하면 명목상 주권만이 존재하게 될 뿐이다. 그러면 '국경 없는 세계'라는 원래 미국 민주당을 주류로 한 세력의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지 않겠는가?
글로벌리즘은 오랜 역사의 막후에 존재해왔다. “나에게 어떤 국가의 돈을 통제하게 해주면, 그 국가의 법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든 나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라고 나탄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가 말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정말 글로벌 엘리트들은 유일신 사상에서 나타난 절대적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고, AI와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의 활동을 감시하고 심지어 예측하게 되면, 전지전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의 매력은 인간의 속성인 권력, 영광, 사상에서 유래된다고 하겠다.
오늘날 러시아는 글로벌리즘에 반대하고 있다. 비록 푸틴의 정체(regime)가 권위주의적 체제라도 더 이상 러시아를 스탈린의 소련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푸틴은 스탈린과는 명백히 다르다. 거의 확실히 푸틴은 그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알렉산더 두긴(Alexander Dugin)의 철학과 지정학을 기반으로 국가전략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인다. 최근 푸틴의 국정연설, 각종 인터뷰는 이를 방증한다. 푸틴은 이러한 연설과 인터뷰에서 각 국가 주권의 가치, 미국의 '워키즘'(wokeism)에 대항할 수 있는 가족과 성별의 전통적 중요성, 그리고 종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글로벌 엘리트의 인간 존재성 부정에 대항하면서, 하이데거적 인간 존재(The existential)가 인간 역사, 세계의 운명에 부과한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의 문제를 던지고 있다.
오호라! 이러한 푸틴의 생각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전통적인 청교도적 가치에 어느 정도 비견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한민국은, 이 글의 초반에 언급한 19세기 말, 20세기 초중반에 직면했던 정치 철학적, 사상적 영향력과 같은 현상을 다시 접할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만일 우리 지성들이 미국의 모노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글로벌리즘의 일방주의에 맞서는 국가가 러시아라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신중한 전략적인 접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미국의 헤게모니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내부적 혼란과 외부적 위축은 부정할 수 없어도, 신세계(New World)의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과 금융 권력, 기술적, 문화적 그리고 사상적 영향력을 가진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말대로 러시아는 구세계(Old World)인 유라시아를 지배할 유일한 국가일 수 있고,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자급자족할 수 있는 유일한 유라시아 국가이지만, 금융 지배력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과 같이 기축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러시아는 그들이 대립하는 바로 그 미국과 같이 세계적인 수입국이 되어야 한다. 기축통화국 지위는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러시아가 미국을 능가하는 세력이 되려면, 역사적 금융 세력과 손을 잡고 아무리 짧아도 반세기 이후나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협조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러시아 포비아에 동승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서구의 제재에도 동참해야 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에도 동승해야 하지만 글로벌 엘리트의 의도에 무조건 끌려서는 안 된다. 19세기 말,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의 이해 속에서 러시아와 관계를 이끌어야 한다. 감히 조언하자면, 적어도 학문적 교류, 예를 들어, 학자 및 젊은 학생 교류, 기술 교류, 군사 지식 교류, 물류업 협력, 데이터 정보 교류 협력, 통신 기반 산업 협력 등 가능한 범위를 넓히며 반드시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이 절실하다. 레이몽 아롱이 말한 “그렁프레르(grand frère)”에 대해 이 정도는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관계성을 갖는 국제정치 현실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과 이에 따른 엄격한 대립만이 정당성을 갖는 것인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반으로 나누기로 약속했을 때 그것을 알지 못해 지리적 단절에 이끌린 한반도의 경험, 그리고 에치슨 라인이라는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의 단절이 결국 전쟁을 가져왔던 경험 말이다. 국제질서의 무지로 인한 단절이 아닌 사회학적 관계성 유지가 더 나은 이익을 창출한다면, 이를 무모하게 거부할 정당성은 없다. 어쨌든 생존과 국익을 최우선 순위에 둬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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