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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탐구의 심성과 준수의 심성 6. 중화의 실상을 보게 된 한 조선인:표해록

    전문위원 권희영

    2024.03.26 10:20
    제1부   탐구의 심성과  준수의 심성   6. 중화의 실상을  보게 된 한 조선인:표해록

    조선인 최부

      조선인 최부는 1454년 나주에서 최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는 1486년 중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이듬 해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이 해 9월에 그는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근무하던 중에 이등해에 부친상을 맞이하여 집으로 가던 중 폭풍을 맞아 표류하다가 명 나라 태주에 도착하였다. 이후, 수많은 위험을 맞이하였지만 다행히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 성종은 표류와 중국의 경험을 기록하라는 명을 내려 그는 "표해록"이라는 기록을 저술하였다. 성종 재위시 최부는 1493년에 홍문관 교리가 되는 등 중용되었으나, 연산군 재위 시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시 사형에 처해졌다(1504). 그러나 1506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그가 표류 끝에 경험한 "표해록"은 명의 실상을 생생하게 후세에 전해주었다. 덕분에, 근대로 진입하는 유럽과 유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대비를 생동감있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최부 일행의 표류

      조선의 관리가 명의 연호를 사용하여 조선 국왕에 바친 글 "표해록"의 첫 부분은 "성화 23년 9월 17일"로 시작된다. 최부는 추쇄경차관으로서 제주에 파견되어, 전라도에서 7명의 부하를 차출하여 해남현에서 순풍을 기다렸다. 11월 11일(이하 모두 음력 표기) 아침, 그는 제주목사 허희와 함께 관두량에서 출발하여 11월 12일 저녁 제주 조천관에 도착하였다. 이후 2달 정도가 지나서 1월 30일, 최부의 하인이 최부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최부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곧바로 준비하여, 윤달 1월 3일에 서둘러 화북포구를 출발하였다. 그런데, 5리쯤 가서 바람 때문에 선장이 최부에게 회항을 권했다. 그런데 일행 중 안의는 "왕명을 받들었던 신하는 표류하거나 침몰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임금의 덕이 지극하여 하늘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대했다. 그러나 사공들은 "누구 잘못으로 이런 날에 우리가 항해를 시작했단 말이냐?"라며 항해를 거부하였다. 배는 초란도로 떠내려가게 되었다. 닻은 부러지고, 돛은 찢어졌다. 배는 계속 표류하였고, 일행은 배에서 물을 퍼냈다. 물과 식량도 떨어져, 오줌을 마시고, 빗물도 마시게 되었다. 1월 11일저녁에 가서야 이름모를 섬에 도착하여 배를 정박하였다. 다음 날 중국의 해적선 2척이 접근하여 금은을 요구하며 고문도 행하였다. 다음 날 해적은 떠났고 다시 표류를 시작했다. 1월 16일, 표류하던 배는 태주시 삼문현 우두외양을 지나는데, 6척의 배가 접근해 포위하고, 배에 들어와 물건을 빼앗고, 일행을 끌고 가려 했다. 비가 와서 경비가 소흘한 틈을 타서, 최부 일행은 수풀 속으로 탈출하였다. 이어서 인가에 도달했는데, 사람들이 일행의 신원을 물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의 왕명을 받은 신하라는 것을 관대, 서류 등을 보여주고, 관청에 알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들은 "귀국이 예의지국"이라 들었다며, 음식을 제공하고 불당에서 쉬게 하였고, 이어서 최부 일행을 이끌고 갔다. 일행이 마을을 지날 때, 사람들은 몽둥이질을 하기도 하고 약탈도 하였다. 일행이 포봉리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당두채를 수비하는 허청이라는 관리를 만났다. 1월 19일에 일행은 기진맥진하여 해문위 도저소에 도착하였다. 관리는 일행을 왜적이라 의심하고 있었고, 최부는 자신이 조선의 문사임을 밝혔다. 일행은 이곳에서 비로소 일행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명은 "왜인을 잡으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이를 보고"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는데, 최부가 처음 배를 댔을 때 사자채의 수채관이 상을 받으려고, "왜선14척이 변경을 침입하여 주민을 약탈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최부 일행을 체포하여 죽이려 했는데, 일행이 배를 버리고 마을로 도망을 가서 실패한 것이라고 알려준 것이다. 사자채에서는 관원의 심문을 받으며, 일행의 배는 1척이고, 관대와 문서를 보여주고 일행이 조선인임을 밝혔다. 서면 진술을 마치자 그들은 최부를 별관에 묵게하고 음식을 제공하였다. 

    최부의 명과 조선 인식

      1월 24일, 최부 일행은 거룻배를 타고 건도소(삼문만의 천호소)로 건너갔다. 다음 날, 최부는 이앙 장군에게 인사를 하고 치하하였다. "우리나라의 의관문물이 중국의 것과 같으므로 다른 나라로 볼 수는 없는 것이오...우리나라는 천조를 정성스럽게 섬기고 있으며 조공도 어긋남이 없소"라며 친밀함을 표시하였다. 최부 일행은 1월 26일 영해현을 지나고 2월 4일 소흥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심문을 받았다. 조선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조선의 연혁과 문물에 대해 보고하도록 했다. 여기서 최부의 역사인식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조선의 기원을 단군으로 삼았다. "단군은 당요와 나란히 일어났소...그후 천년이 넘게 계승되었소...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8조의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소...연나라의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후손인 기준을 축출하였는데, 기준은 마한으로 도망가 그곳에 도읍을 했소...". 그는 또한 "풍속에 대해서는 예와 의를 숭상하고 오륜을 지키며 유학을 존중하고 있소...형제는 대명률을, 상제는 주자의 가례를 따르고 있소. 의관은 중국 제도에 준하고 있소."로 답하였다. 이어서 최부 일행은 2월6일 항주에 도착하여 또 심문을 받았다. 9일에 가서야 최부 일행이 왜인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려, 명의 관리는 일행이 북경을 거쳐 환국할 것임을 알려주었다. 10일에는 명의 고벽이 귀국행로를 알려주었는데, 바다는 항로가 험난하여 수로를 통하여 북경으로 간다고 하였다. 북경-항주의 수로는 40일의 여정이라는 것도 알렸다. 이리하여 일행은 2월 13일에 항주에서 출발하여 3월 8일에 노교역에 도착하였다. 

    명 나라 태감 목격과 최부의 유학 인식

      최부 일행은 노교역 인근에서 봉왕을 받기 위해 수도로 가는 태감을 목격하게 되었다. "수많은 깃발, 갑옷과 투구, 종과, 북과 악기가 강을 진동시켰다...수문에 이르러서는 그는 뱃사람에게 탄환을 함부로 쏘아대고 있었다". 안내하던 사람 부영이 말하였다. "태상황제가 환관을 신임하여 직책을 주었소. 그러한 이유로 저 사람처럼 근시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소. 문무관들 모두 그들에게 아부를 하고 있소"라 설명하였다. 일행은 3월 10일에 개하역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에서 양왕이라는 사람이 사당에 들어가 분향하고 절한 후에, 최부 일행에게도 절을 하라고 하였다. 이에 최부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후가 할 일이오. 선비나 서민은 조상에게만 제사를 지낼 뿐이오"라고 대답하였다. 3월 17일에는 은현 지방에 이르러서 부영이라는 이름의 안내자를 만나 영파주에서 도적을 만난 경험을 말해주었는데, 부영은 "대체로 북쪽의 중국인들은 강하고 사납소.남쪽은 온순하고 공격적이지 않소. 따라서, 비록 그들이 무법자로 도둑질은 하지만 사람은 죽이지 않소. 그래서 목숨을 구한 것이오"라는 설명을 들었다. 21일에는 창주를 지나며 부영이 안내하기를, 명의 황제가 친히 국자감에 행차하여 석전(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행하여 유학을 숭상하다는 것을 알렸다. 최부가 "천자가 제후 국가의 신하에게 절을 한단 말이오?"라고 반문하였다. 이에 부영은 설명하여 "천자가 절을 하려고 하면 옆의 다른 찬례관이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였소'"라고 소리쳐서, 실제로는 절을 하지 않고, 공자와 천자 모두를 존중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최부는 강하게 반박하여, "공자의 도는 천지보다 크고 해와 달보다 밝으며 네 계절보다 더 한결같소. 그의 도는 천하 만대에 무궁하오...천자에서 백성까지 모두 예로써 공자를 받들어 모셔야만 되오"라고 응답하였다. 23일에는 정해현을 지날 때 수차를 보고 질의하여 기계의 형태와 운용법을 배웠다. 29일에는 병부에 들어가서 천하의 지도를 보았고, 조선에서 상을 치를 때 문공(주희)가례를 사용하는지 물었을 때, 소학과 가례를 따른다고 답하였다. 4월 7일이 되자 예부의 관리들이 병부에서 예부로 보낸 공문서를 보여주었다. 최부는 고마움을 표하려고 술을 선물하려 했으나 그들은 돈이나 산물을 원하여서, 돈 10문을 주자 그 돈을 뿌리고 화를 내고 떠났다. 4월 20일에는 황제에게 사은을 하기 위하여 관복을 입으라 했는데, 최부는 "상중인데 비단옷에 사모(비단실 모자)를 쓰면 내가 마음이 편하겠소?"라고 하니 그들은 "황제의 은혜가 있는데 사례를 하지 않는다면 신하의 예절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오"라 하자 마침내 따르기는 했지만, 그들로부터 "자신의 생각만 매달리면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오"라는 핀잔을 들었다. 이어서 최부 일행 일부가 상을 받자 이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은 데다가 황제 앞에서 절까지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행운입니까?"라고 하자 최부는 "상을 준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긴 우리나라 임금의 덕분이지"라고 말하였다. 21일 관원 장술조가 와서 보여준 문서에는 "일행을 조선국경까지 책임지고 호송하여 국경에 이르면 스스로 귀국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최부의 중국 풍습 관찰

      최부는 명나라의 풍습을 관찰하고서, "성대한 조정의 문물이 볼만했다. 그러나 여염 사람들은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는 숭상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상업에 종사하고 농사는 별 관심이 없다. 의복은 짧고 좁은데 남녀가 같은 옷차림이다. 음식은 고약한 냄새가 났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식기를 같이 쓰고 있다. 아직도 이러한 풍속이 말끔하게 없어지지 않아 안타까운 일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4월 27일에는 어양역에 도착하여 귀국을 기대할 수 있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명 나라의 구석진 모습을 또한 보게 되었다. 30일에 동관체운소에서 전능이라는 관리가 창고지기 문종에게 수레를 내어 보내자고 하자, 문종이 화를 내며 전능의 수염을 잡아채는 것을 목격하였다. 최부는 "관리의 기강이 그처럼 형편없었다"고 평하였다. 5월 8일에는 고령역에서 최부의 군인 문회가 당나귀를 재촉하며 몰자 역에서 나온 사람이 몽둥이로 군인의 머리를 구타하여 피가 솟구쳤다. 이에 최부는 전둔위에 가서 항의하여 인을 체포하게 하였다. 17일에는 광녕역에서 조선의 사신 일행이 최부 일행을 위로하였다. 최부의 일행은 다행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고, 구금되지도 않고 오히려 황제로 부터 상을 받았다. 이 행운에 대해 최부는 "그 모두 성상께서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피시고 진실된 마음으로 대국을 섬긴 덕분이라네"라 말하였다. 24일에는 계면이라는 승려를 만났는데 그의 조상은 조선사람이었다. 그는 새 황제가 절과 암자를 폐지하고 도첩 없는 승려를 환속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에 최부는 차갑게 답하였다:"철거된 사찰은 민가가 되고, 파괴된 청동불상은 그릇이 되며 깍은 머리는 길게 하여 군대로 채워지겠소. 이러한 대성인의 행위는 보통의 군보다 단연 월등하구려..." 말을 마치기 전에 계면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26일에는 왕헌이라는 통역이 최부 일행이 무사히 귀국하는 것을 축하하자 최부는 "황제의 은혜"와 "선친의 음덕" 때문이라 하였다. 최부 일행은 6월 4일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으로 들어갔다. 조선으로 무사히 귀국한 것이다. 

    최부의 사대주의

    조선의 고위 관료이자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조선 유학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이며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소"라 했다. 조선에서 "읽고 존중되는 것은 사서오경이오. 의관과 예악은 중국의 제도를 지키고 있소", "연호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나라를 따르고 있소"라 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나라는 이단을 배척하고 유도를 숭상하고 있소", "당연히 섬겨야 할 귀신은 섬기고 음사는 지내지 않소"라 하며 "기자의 사당은 평양에 있으며 매년 봄, 가을에 국가에서 분향을 하며 짐승과 예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림=위키백과)

    전문위원 권희영

    1989-2021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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