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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묘>가 좌파 반일 영화라는 말

    청년학생 칼럼니스트 김현주

    2024.03.29 14:42
    영화 &lt;파묘&gt;가 좌파 반일 영화라는 말

    이하의 내용에는 영화 <파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달 26,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개인 SNS를 통해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영화 <파묘>로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특정 정치 성향을 가진 인터넷 커뮤니티를 포함한 일각에서는 영화 <파묘>좌파 반일 영화라고 지칭하며 조롱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파묘>는 한국의 무교 신앙과 풍수지리라는 소재를 이용해,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담아낸 영화다.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이 영화에는 이데올로기가 담겨있다기보단 한국 사람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와 감정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일각의 의견에 대해 답했다. ‘반일 좌파 논쟁이 불을 붙인 것일까, 오히려 <파묘>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흥행을 거듭 중이다.
     
    하나. 한국의 우파들은 왜 민족주의를 두려워하는가?
     과연 <파묘>는 정말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좌파성향의 영화일까. 우선, 다른 모든 논의에 앞서 한 가지를 짚자.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서 이끌어내는 정서가 무엇인지 굳이 고르자면 그것은 민족주의일 것이다. 영화 <파묘>1부는 미국으로 이민 간 친일파 후손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밑도 끝도 없는 부자예요, 그냥 부자라는 등장인물 화림의 대사는 한국 사회에서 이유 없는 부자란 어떤 존재일지에 대한 일종의 복선으로서 작용한다. <파묘>2부는 흔히 접해 봤을 일제가 한국 땅의 풍수지리적 요충지에 쇠말뚝을 박아 한민족의 정기를 끊었다는 일설을 차용해 진행된다. 1부에서 친일파 귀신을 상대했던 주인공들은 2부에서 조선총독부가 땅에 박아 놓은 쇠말뚝과, 거기 붙은 오니(일본 요괴)와 분투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당연한 의문이 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개 민족주의는 보수 성향으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 서사적 영화에 어쩌다 좌파딱지가 붙었을까? 이 영화를 싫어할 우파들은 왜 민족주의 위에 반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리를 두려고 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는 친일 잔재가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짚을 때다. 이 영화를 보편적인 이 땅의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만들었다는 장재현 감독은 몹시 영리했다. 이것은 필자가 끌어올 두 번째 논의로도 이어진다.
     
    .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상처는 누가 만들었는가?
     무교를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한 가지 명제가 있다. 한국의 무교는 (어느 종교가 안 그러하겠냐만은) 사람을 위한 종교다. 또한 무교는 남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한을 풀고' 그리고 '달래기' 위한 종교다. 한 맺힌 귀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배고픈 귀는 먹여주고 그렇게 달래 성불시킨다. 신 앞에 서서 청원을 드림으로써 인간의 한을 풀고 자신 안의 서러움을 달랜다. 그렇기 때문에 <파묘>는 몹시 인간적인, 인간을 위한 영화일 수 밖에 없다. 무교를 핵심으로 끌어온 시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동시에, <파묘>는 다른 수많은 오컬트 소재를 제쳐 놓고서 무교를 소재로 끌어온 영화일 수밖에 없다. 단순한 공포가 아닌, 치유와 풀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종교의 기능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파묘>는 기능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영화다1980년대 이한열 열사 추모 시위에서는 진혼굿이 함께 진행됐다. 시위대와 함께 무가를 부르고 살풀이춤을 춘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은 이렇게 언급했다. '살을 푸는 것은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다. 사회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무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노력이다.' 
     
    종교는 상흔을 봉합한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유일하게 종교의 이 기능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곱씹어 보면 <파묘>가 일각에서는 '반일 좌파 영화' 소리를 듣는 것은 결국 필연적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가 아닌 다른 소재를 차용했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상처란 대체 무엇이 있을까? 우리 사회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이 땅 위의 아픔'이란 무엇이 있을까? 지금처럼 일제 강점기를 사용했건,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가는 이야기를 썼건, 데모하다가 죽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썼건, 배가 가라앉는 이야기를 썼건 상관 없다. 
    이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됐어야 했으므로. 이것은 우리 사회의 상처를 만든 것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그 범인이 누구인지 이제 와서 세세히 따지지는 않겠다. 장재현 감독도 그렇게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사진=연합뉴스) 여전히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파묘.

    청년학생 칼럼니스트 김현주

    前 서강학보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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