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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최장 투표용지, 선택지는 여전히 좁다

    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임예영

    2024.04.09 11:31
    역대 최장 투표용지, 선택지는 여전히 좁다

    지난 총선보다 소수자 관련 공약 부실
    '소신 대신 전략투표' 목적 잃은 비례대표제

     이번 총선 유권자들은 역대 최장 비례투표 용지를 받는다. 용지 길이가 51.7cm이니 20인치 캐리어 세로 길이와 비슷한 셈이다. 개혁신당, 녹색정의당, 새로운미래, 조국혁신당 등은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정권 심판론을 주장했다. 특히 조국혁신당은 “3년은 너무 길다를 구호로 외치며 비례대표 지지도 1(25%)를 차지했다.(연합뉴스·연합뉴스TV-메트릭스, 330~31일 조사)


     제3지대 정당이 다양해진 만큼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커지리라고 기대했다. 3지대가 소수자의 권리를 논의하면 거대 양당도 명목상 관련 공약을 제시하거나 행동을 보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총선을 며칠 앞둔 지금, 기대는 희미해졌다.
     
    양당 지역구 공천 구성만 봐도 그렇다. 이번 총선에서 양당의 지역구 여성 공천 비율은 14%, 2030세대 비율은 5%대에 머물렀다. 여성·장애인 등 소수자 관련 공약은 20대 총선 때보다 훨씬 부실해졌다. 국민의힘은 이번 총선에서 여성 범죄와 저출생 대책만을 내세웠을 뿐 성평등 관련 공약은 빈칸이며 장애라는 단어는 등장하지도 않는다더불어민주당의 변화는 더 뚜렷하다. 21대 총선에 있던 성평등 실현목표가 사라졌고 저출생과 안전에만 초점을 맞췄다. 차별금지법도 언급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었지만 진보 진영의 논의는 여전하다. ‘진보 세력끼리 힘을 모아야 한다’, ‘소신투표 대신 전략투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20대 대선에서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2년 전 주장이 지금도 유효하려면 그때와 상황이 똑같아야 한다. 2030여성 중 일부가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 대신 민주당, 즉 소신투표 대신 전략투표를 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 둘째, 민주당의 소수자 관련 공약이 탄탄했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선 어떤가? 둘 중 하나만 충족한 상태로 전략투표를 요구하고 있진 않은가?
     물론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전략투표가 가능한 건 아니다. 진보 세력 간의 단일화나 양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1987년 대선이 대표적이다. 당시 여당에선 노태우가, 야당에선 김영삼·김대중·백기완이 출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표가 갈리면서 결국 노태우가 당선됐다. 당시 김기원 한국방송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에서 “김대중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부분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만약 김대중이나 그를 지지한 진보세력이, 정말로 국민대중의 이익을 생각했다면 김영삼에게 양보해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군사정권 종식을 이룩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진보적인 후보라면 그 이유 때문에라도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략투표를 주장하는 이들도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에서 2030여성의 표를 다수 얻었지만, 연이어 터진 성범죄 사건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민주당이 주장하는 진보에 성소수자는 철저히 배제돼있다.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는 명목상 이유로 이번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성소수자인 그를 배척하는 종교계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당 관계자의 인터뷰가 있었다. 2017왜 성평등 정책 안에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냐는 질문에 문재인 당시 전 대표가 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답하자 나중에! 나중에!”라고 따라 외치던 청중들이 떠오른다.

     ‘정치(투표)는 현실이라고들 한다. 이상만으론 원하는 세상에 가까워질 수 없다는 의미일 테다. 오죽하면 투표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라는 말도 있을까. 2년 전엔 그 현실에 동의해 표를 던졌지만 이쯤에서 묻고 싶다. 그 현실은 누굴 위한 현실인가. 민주당이 정의하는 진보에 포함되지 않는 자들이 언젠간 때가 오길 바라며 자신을 대변해줄 소수정당 대신 민주당을 뽑는다고 치자. 그럼 국회엔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줄 사람이 없다. 자신을 대변해줄 사람을 한 명이라도 국회에 보내기 위해 소신투표를 하면 보수 정당 당선에 일조했다며 사표 취급을 받는다.

     이 지지부진한 담론을 끝낼 때가 됐다. 비례대표제도에선 특히 그렇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소수정당의 국회 진출을 위해 도입됐지만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그런 제도에 동의한 적 없다며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민주당도 위성정당 방지법을 약속하더니 결국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소수정당의 몫은 오히려 줄어들었고, 막대한 책임과 고민은 전부 유권자의 몫이 됐다.
     이번에도 현실을 위해 당선 가능성 있는 진보에 표를 던진 소수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표를 '보장된 표' 아니면 '사표'로 보는 얄팍한 시각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오만이나 분노 대신 반성의 계기로 삼길 바란다. 역대 최장 비례대표 용지 앞에서 머리를 싸맨 유권자를 위해서라도, 이번 국회는 선거제도를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상대편에 지고 싶지 않아 위성정당을 만들어놓곤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고 정당화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정말 국민을 위한다면 말이다.
     
    (사진=연합뉴스) 22대 총선을 앞두고 선관위 관계자들이 비례대표 투표 용지를 확인하고 있다

    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임예영

    前 고대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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