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권희영
2024.04.29 09:42 글로벌 시장과 동아시아 판도의 변화
16세기 말 유럽은 이미 신대륙을 경영하며, 전 세계를 하나의 글로벌 시장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흐름에 명과 일본이 이미 참여하고 있었던 바, 조선은 글로벌 시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1600년 전후 중국은 유럽의 존재를 인지하고 '태서'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유럽에서는 동아시아를 '원동(Far East)'으로 표현하였다. 동아시아의 시장에서 중국은 생사와 사직품을 공급하였고,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는 구매자였다. 그외에도 중국의 도자기, 차 및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의 향료가 교역되었다. 그런데, 명은 바다에서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금이라는 제동을 걸었다. 그 결과 중국 산품의 교역은 유럽과 일본이 장악하였다. 1567년 명은 남양 무역 금지령을 해제했는데 일본과의 교역은 금지하여서 일본 상인들은 명을 우회하여 상품을 수입하였다. 그 결과 일본이나 중국의 상인은 해적이 되거나 왜구가 되었다. 유럽과 일본, 아메리카에서도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은이 주된 화폐가 되었다. 유럽과 일본은 은으로 중국 산품을 사고 유럽은 동남아 향료를 중국에 팔았다. 반면 명은 높은 물가상승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으며, 명을 추종하는 정책을 쓴 조선은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들(일본, 후금)에 의하여 전쟁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의 통일과 조선의 외교적 대응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하여 전국시대의 막을 내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가 되어 일본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조선과 명을 경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쓰시마 도주를 만나 조선 왕의 입조알현을 지시하였다(1587). 이에 도주는 일본국왕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사정을 알리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일본을 야만국으로 여기며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였다. 쓰시마 도주 요시토시는 승려 겐소와 함께 직접 조선에 와 통신사를 다시 간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통일축하를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1590년 3월). 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은 허성이 맡았다. 통신사 일행은 한양을 출발하여 대마도에 머무르다 교토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동북지방의 전쟁으로 11월에 가서야 국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답서를 바로 받지 못하여 다음 해인 1591년 3월에서야 일본 사신 일행과 같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귀국 길에 통신사가 답서를 보았는데, 조선 왕을 합하로 칭하고 왕의 입조를 요구한 것이다. 통신사는 내용이 불손하다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겐소 일행은 답서를 갖고 일본으로 간 뒤에, 겐소는 다시 부산포를 방문하여 침략 계획을 알렸는데, 10일이 지나도 답을 받지 못해서 그대로 돌아갔다. 이어서 왜관의 일본인이 돌아가고 왜관이 비자, 그때서야 조선은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침략 계획과 조선의 대응
일본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꾸려고 하였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일본과 조선이 연합하여 명을 침공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성절사 김응남 사행 편에 이를 명에 알렸다. 이에 명은 조선으로 하여금 유구 등과 같이 일본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동지사 이유인은 "천조의 입장에서는 동병할 계책을 세울 것도 없겠지만, 신자의 분통함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만약 왜적을 치게 된다면 반드시 용기를 분발하여 적성에 앞장서서 오를 것입니다...왜적 때문에 부모의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명 황제는 "조선은 본래부터 공손함을 바치어 우리의 속국이 되었다... 힘을 다해 왜적들을 무찔러 평정하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형세가 지탱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구원병을 청하여 대응하는 것도 무방하니 기한을 정해 적을 섬멸하여 우리의 울타리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1592년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1598년까지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누르하치의 등장과 명.후금.조선의 전쟁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이 일본과 맞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세력을 키워나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명의 관심이 조선에 집중된 사이, 누르하치는 명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타 부족들을 통합해나갔다. 그는 명과의 전쟁을 피하면서 칸의 지위에 올랐고 국명을 후금으로 하였다(1616.1월). 이 무렵 약 12만의 군대를 보유하였다. 그는 팔기의 깃발로 만주족을 팔기의 일원으로 속하게 하여 군사 체제로 구성된 국가를 만들었다. 만주족, 몽골족, 한족으로 조직된 니루(300명)의 단위로 조직한 것이다. 따라서 팔기는 군단이며 동시에 백성의 소속 집단이 되었다. 그는 나아가서 명을 정복할 결심을 하였다. 누르하치는 '7대원한'을 하늘에 고하고(1618.4.13) 명 정벌을 맹세하였다. 곧 이어 무순을 공격하여 3일만에 점령했다. 그런데 명과 조선은 후금을 가볍게 보았다. 명의 첩자는 조정에 "누르하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한다고 보고했고, 조선은 명에 보내는 상주문에서 후금이 명의 보복을 두려워한다는 설명도 하였다.
살이호의 전투
그러나 곧 명은 심각함을 느끼고 정벌의 책임자로 양호를 요동경략으로 임명했다. 조선에도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 명은 10만의 군대를 소집하였고 조선과 엽혁의 군대 2만도 추가되었다. 요동경략 양호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동로군은 유정이 지휘하였는데, 군대에는 조선이 파견한 김홍립의 원군도 있었다. 누르하치는 주 전쟁터가 될 곳을 예측하여 계번산과 살이호산이 있는 곳으로 군대를 배치하였다. 소자하에 제방을 쌓아 놓아 수공을 준비하였다. 양호의 부장 두송은 공을 세우려고 서두르다 수공을 받아 두송은 전사하고 군대는 완패하였다(1619.3.2). 명의 서로군과 북로군 역시 패하였다. 누르하치는 이어서 동로군에 대비하여 기만 전술을 사용하였다. 두송이 승리한 것 처럼 속여서, 유정이 오판하여 진군하다가, 매복한 후금 군대에 패하였다. 유정 부대에 속한 원군은 몰살되었지만 강홍립이 이끄는 부대는 투항했다. 남로군은 이여백이 지휘했는데, 그는 상황을 지켜보다 무사히 회군하였다. 살이호 전투에서 열세였던 군사를 가지고 불과 5일의 전쟁으로 후금은 압도적 승리를 했다. 이 전쟁으로 명은 화기,전마,전차 등 보유 무기의 2/3를 잃었다. 이후 명은 군비가 부족할 뿐 아니라 징집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명의 정쟁과 조선의 모문룡 지원
이후 명은 옹정필을 요동경략에 임명하고 후금을 압박하고자 하였다. 옹정필은 요동을 잘 방어하였지만 명의 조정에서 정쟁은 극심했다. 환관으로 구성된 엄당의 수장인 태감 위충련은 옹정필을 요동경략에서 해임했다. 후임은 원응태인데, 그는 엄당의 환심을 사기 위해 후금의 도성을 공략하는 공격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심양으로 진군했다. 성을 차지하고 곧 요양성을 함락했다. 심양과 요양을 10일만에 함락한 것이다(1621.3). 황제는 다시 옹정필을 등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엄당의 사람인 왕화정을 요동순무로 승진시켰다. 옹정필과 왕화정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이 때에 누르하치가 광녕으로 진격하여 광녕성은 후금에 넘어갔다. 이로써 후금은 요하 동서 양안의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요양으로 천도하였다. 누르하치는 이제 한족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항복한 명의 장군과 관리를 그대로 임명하여 질서를 회복하였다. 상인과 기술자도 보호하여 경제의 번영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충성의 표시로 삭발을 요구하였다. 이에 한족은 피난으로 대응하였다. 이 때 조선은 명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요동의 도망자인 모문룡을 명과 조선의 국경지대인 가도(피도)에 주둔케 하여 후금에 저항하게 하였다.
후금과 조선의 외교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의 대 후금 무대응 전략 대신 적극적인 친명책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후금은 위협을 받게 되었고 물자 조달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후금은 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이 때에 조선에서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기회에 후금의 태종은 아민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케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 군은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고 주력은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조선군은 후금군의 저지에 실패하고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하였다. 결국,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로 관계를 설정하였다(1627.3.3). 후금에 세폐을 바치고 함께 중강의 개시를 열었다. 이후, 후금은 명을 정복하기 위하여 조선에 식량과 병선을 요구하였고 또한 조선과의 외교를 군신의 관계로 하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척화론이 대두하였다. 이에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하지도 않고 국서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으로, 연호를 숭덕으로 고치고, 결국, 조선을 침공하였다(1636.12). 조선의 기개는 대단하였으나 전쟁에서는 승리할 수 없었다. 조선은 항복을 하였다. 인조는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을 나왔고 왕세자가 따랐다.”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용골대는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고, 인조와 세자는 제관을 거느리고, 인조는 삼전도로 나와 삼궤구고두례(3번 무릎을 꿇고 그 때마다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하고 항복하였다. 청을 상국의 황제로 섬기고 신하로서 충성하겠다는 의식이었다. 인조를 해질 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여서, 용골대는 군병을 이끌고 인조를 인도하여 창경군 양화당으로 갔다. 2월 2일에 청의 홍타이지는 삼전도에서 철군하여 돌아갔고 인조는 전곳장에 나가 이제는 황제를 전송하였다(1637.2.2). 조선은 결국 청에 조공하고 조선의 국왕은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존명 사대주의와 조선의 각성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의 국력을 고갈시켰다. 조선은 단독으로는 도저히 상대하기 어려웠던 상대인 일본 그리고 후금(청)을 상대하여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들을 통하여 일관된 것은 조선의 존명 사대주의적 인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원치 않더라도 청을 제국으로 섬겨야 했고, 일본이 마땅치 않았어도 외교를 해야만 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를 인정해야 했고, 선조 40년(1607) 강화를 맺어 1811년까지 12차례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전쟁을 통해서 마지못해 이루어진 외교였지만, 청과 일본과의 교류를 통하여 조선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접하고 스스로를 혁신해야 한다는 자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를 통하여 알지 못하였던 국제 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무시했던 일본의 높은 유학 수준도 알게 되었다. 조선은 또한 청과의 교류를 통하여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도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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