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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그램 스캔들 : 디지털 세계 질서의 필요성

    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이휘경

    2024.09.11 13:27
    텔레그램 스캔들 : 디지털 세계 질서의 필요성

     무정부 상태(Anarchy)는 국제 정치 이론에서 기본이 되는 가정이다.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 등 다양한 이론들은 이러한 무정부적 세계라는 무대에서 각 국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이론화한다. 여기서 무정부 상태란 국가의 상위 권위체가 없어, 불확실성과 가치의 혼재로 가득 찬 상태를 일컫는다. 국가로 대표되는 인간 사회 집단 모두가 하나의 권위체 아래 일관된 질서를 구축하고 적용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텔레그램(Telegram)이야말로 무정부적 낙원이라고 불리는 게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텔레그램에서는 통제의 범위를 벗어난 각종 마약 및 무기 거래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의 집합 등 제도권을 이탈한 행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착취를 비롯한 성범죄 문제로 벌써 두 차례나 문제가 불거졌다.

     지난달 프랑스 정부의 텔레그램 CEO 파벨 두로프(Pavel Durov) 체포 건은 기술 규제가 어디까지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의 커다란 신호탄이 되었다. 그전에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법적, 윤리적 책임 문제는 자주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복제 배아줄기 세포가 주목을 받아 이를 둘러싼 생명 윤리 논쟁이 뜨거웠다. 또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편향성과 지적재산권 등의 문제가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두로프의 체포와 거의 동시에 이슈화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 및 유통 사건은 너무나 음지화되어 버린 디지털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특히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기술의 통제가 논의되었던 지난날과 다르다. 텔레그램이 만들어낸 세상은 애초에 이 사회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 물리적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나, 어쩌면 그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지털 공간은 인간을 규율하고, 사회의 질서를 구축했던 인류의 역사적 산물인 시스템을 벗어나 만들어진 원초적인 또 다른 세계다. 가상 환경 속에서 인간은 새롭게 자신을 캐릭터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움으로써 각종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보는 물리적 세상에서 작게는 가족, 크게는 사회 안에서 수많은 관계성으로 구축된 자기 자신이라는 허울을 벗고 원초적 욕망, 이를테면 맹목적인 자극 및 권력 등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사건은 ‘국민과 국가’가 존재하는 세계와 ‘개인과 플랫폼’이 존재하는 두 세계의 충돌이다. 텔레그램으로 대표되는 고도화된 디지털 세상은 점점 더 사생활 보호와 익명성이라는 이명 아래 무정부 상태로 진화하고 있다. 두로프는 무정부적 낙원이라는 표현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매일 몇백 만 개의 해로운 게시물과 채널들을 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플랫폼이 오직 인권을 수호하는 선의 편에 있기 위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예로 러시아와 이란에서 국가 권력에 불복종하고 평화시위자들을 보호하려다 금지당한 사례를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시장을 언제든 떠날 수 있음을 밝히며 현재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동은 발이 있지만, 자본은 발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쥐게 된 자본을 등에 업고, 수많은 제2의 자아들이 사는 세상을 이끄는 그의 이러한 발언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의 말처럼 텔레그램이 만들어낸 긍정적 측면과 그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악마성을 최대로 끌어내는 시스템적 결함 또한 분명 존재한단 점이다. 그래서 더욱이 기술자는 윤리의식을 갖고, 또 사회가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세상을 이끄는 기술은 이제 세상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아닌, 세상의 또 다른 층(layer)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는 가상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기술자들을 국제 사회의 또 다른 행위자로서 정식으로 초대하고, 각종 범죄가 재생산되지 않도록 규율을 만드는 측면에서 협업해야 한다. 단순히 기술자의 법적 책임 내지 윤리의식 수준에서만 논의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텔레그램에 대한 한국과 프랑스의 법적 수사 기사가 연일 올라오고 있다.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디지털 사회의 방향에 대해 진지한 국제적 공조가 필요할 때다.

    (사진 = 파벨 두로브 텔레그램 채널에 올라온 글)

    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이휘경

    前 한대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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