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원한빈
2024.10.05 20:15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의 나치당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유대인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 유전자 보급이란 명목의 이른바 ‘T4 작전’으로 자국 장애인들의 인권도 유린했다. 이러한 독일의 범죄는 국가라는 절대적인 권위와 더불어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독일 사회와 국민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자행됐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역사가 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해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 외교권과 통치권을 강탈했다. 조선인이라는 일상적 차별과 멸시는 차치하더라도 강제 징용과 일본군 성노예, 731부대 생체 실험 등의 전쟁 범죄는 독일의 역사에 비춰봐도 절대 가볍지 않다.
이러한 전쟁 범죄는 가해국과 피해국 모두에 ‘사실적 역사’로 각인되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역사 교과서, 국가 간 외교, 기념관 설립 등 여러 형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다. 전쟁 범죄와 식민 지배의 역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고,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 말이다. 그리고 이 합의는 좌우, 여야, 지역을 떠나 모두가 공유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계속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다. 뉴스에서는 틈만 나면 뉴라이트와 친일, 역사 왜곡이 보도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정부 인사들에게서 일제 강점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이 나오고 ‘반일종족주의’와 같은 친일 미화 서적이 버젓이 서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 80년이 되도록 우리 사회가 소모적인 역사 논쟁을 지속하는 이유는 이렇듯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아 역사를 부정하고 헌법 질서를 어지럽히더라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유럽이 역사 왜곡을 바라보는 자세
유럽의 경우에는 역사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져 있다.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은 이러한 합의를 법률로써 보여주고 있다. 먼저 프랑스는 1990년 게소법(Gayssot Law)을 제정했는데, 이는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등 나치 범죄 부정에 대한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마크롱의 정적 마린 르펜의 부친이자 극우 정당 ‘국민전선(현 국민연합)’을 창당한 장마리 르펜은 1991년 게소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나치의 가스실은 역사의 소소한 문제”라는 등의 발언으로 나치 범죄를 미화했다는 이유였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도 나치를 찬양하거나 미화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인 ‘금지법(Verbotsgesetz)’을 시행하고 있다. 해당 법은 최대 10여 년의 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는 강한 처벌 내용을 갖는다. 가해국 독일 역시 처벌법을 시행 중이다. 독일 형법 130조에 따르면 나치를 찬양하거나 홀로코스트 등 범죄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우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 최근까지도 해당 법을 통해 독일 내 극우단체와 네오나치 구성원들이 처벌을 받고 있다.
정쟁보단 합의로 처벌법 도입해야 한다
역사 왜곡 행위를 처벌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다. 2021년 김용민 의원 등 12명은 ‘역사왜곡방지법안’을 제안한 바 있다. 법안의 주요 골자는 일제 강점기 역사 왜곡을 심리하기 위해 ‘진실한역사를위한심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외에도 법령에 따라 벌금이나 징역의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21대 국회 임기 내 통과되지 못해 결국 폐기됐다. 그에 앞서 2020년 양향자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역사왜곡금지법안’ 역시 임기 만료로 폐기 됐다. 지난 8월 28일 김용만 의원 대표 발의로 ‘헌법부정 및 역사왜곡행위자 공직임용금지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안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역사왜곡 처벌법은 아직 재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80년 동안 입법되지 못한 역사왜곡 처벌법을 ‘만시지탄’이라며 내팽개칠 수만은 없다. 앞으로의 소모적인 역사 논쟁을 끝내기 위해서, 그리고 역사를 부정하는 공직자들의 국정 운영을 막기 위해서 해당 법은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 일제강점의 역사가 정쟁의 소재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역사 왜곡 발언에 대한 심의나 처벌 기준이 없다 보니 정치권에서 이를 정쟁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만 되면 벌어지는 정치권의 역사 논쟁에 국민은 지쳐만 간다. 해당 법안이 통과돼 역사 왜곡 발언이 심의된다면 정치권의 소모적인 역사 논쟁은 보다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여야는 합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지금껏 관련 법안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만 발의하고 있는데, 여당의 참여 없는 법안은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등에 의해 현실적으로 통과되기 어렵다. 성공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여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먼저 민주당은 해당 법안에 대해 여당에 협의를 지속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여당 역시 헌법을 존중하는 공당으로서 합의체 구성에 동의하고 법률안 제정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다음으로 해당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는 사례를 모아 법안을 구체화해야 한다. 기존에 제출됐던 법안들은 다소 포괄적 기술로써 법령이 제정된다 해도 대상자가 법망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를 위해 국회와 역사학계, 시민사회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그동안 정치권과 학계에서의 대표적인 왜곡 발언 및 행위를 발굴하고 이를 법령 위반의 대표 사례로써 제시해야 한다.
유럽 국가들의 법령 제정 및 시행 과정에서 확인된 시행착오도 참고해야 한다. 분명 프랑스의 게소법이나 오스트리아의 금지법 등 법안 역시 ‘표현의 자유’를 명목으로 반대 의견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법이 시행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 진실과 사회적 통합, 인권 보호라는 가치의 실현을 더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처벌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적 규범과 헌법적 가치를 재정립하는 의미도 가진다. 유럽 국가들의 선행 논의를 빌려 앞으로의 갈등을 줄여나갈 노력도 필요하다.
22대 국회가 역사왜곡처벌법 논의를 재개하지 않는다면, 여야 모두는 내년 광복 80주년을 역사 앞에 떳떳하게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국회가 조속히 처벌법 논의를 시작해 더 이상 역사를 정쟁의 한가운데 두지 않고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길 바란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아카이브) 8.15 해방 당시 서대문 형무소 앞 출옥한 독립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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