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김수한
2024.10.08 17:19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 8개월이 지나도록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과거 구 소련 연방에 속한 같은 나라였고, 우크라이나가 분리 독립을 한 이후에도 두 나라는 유사성이 높은 형제 같은 관계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이 멸망하면서 슬라브권이 3개로 분화한 결과값이다. 그들의 시작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누구나 역사의 시작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시작은 삼국유사 등에서 하느님 환인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늘의 신 환인이 있었다.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둔 것을 알고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 땅이었다. 환웅에게 천부인(검, 구슬, 거울) 3개와 무리 3000명을 딸려보내 태백산 신단수 밑에 자리잡으니 이곳이 신시다. 환웅천왕은 풍백, 우, 운사를 거느리고 세상에서 다스리며 어울렸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우리 민족의 시작은 이렇다. 하늘에서 이 땅을 굽어보던 중 태백산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하기 적합한 곳으로 보여 하느님의 아들이 이 일대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워 재세이화(在世理化)했다는 것이다.
러시아도 이러한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가 있을까.
많은 이들이 러시아 바이칼 호수 일대를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지목한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사는 소수민족 중 부리야트족은 한국인과 외모가 무척 비슷하고 이들 사이에는 심청전이나 선녀와 나무꾼 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이들 부리야트족의 게세르 신화는 놀랍게도 우리의 단군 신화와 매우 비슷하다. 일각에서는 부리야트족의 뜻을 부리(부여)+야트(종족, 민족)로 나눠 부여족이라고 풀이한다.
부리야트 공화국 서편에 있는 러시아 연방 내 코미 공화국의 존재 역시 단군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코미 공화국에 사는 코미 족의 민족 이름이 우리 말 '곰'과 유사하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실제로 자신들을 곰의 자손이라고 여기고 곰을 숭배한다는 사실이다. 코미족의 전설도 우리의 단군 신화와 비슷하다. 하늘의 신이 땅으로 내려가고 싶어하는 아들을 곰의 모습으로 땅에 내려보냈고, 그 아들이 곰 암컷과 결혼해 낳은 자식이 한 종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손 종족들은 '코미'라는 말을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쓴다고 한다.
그러나 코미 공화국은 15세기에 모스크바 공국에 합병되었고, 부리야트 공화국 역시 슬라브족에 의해 17세기에 정복된 땅이다.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의 '오리지널'은 아닌 셈이다.
러시아인의 관점에서 러시아 역사의 시작은 8세기 말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북유럽(스웨덴)에 살던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족이 바다를 건너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에 정착한 것이 러시아 역사의 시작이다. 러시아라는 국가명은 이때의 루스족에서 유래했다.
9세기에 접어들자 루스족은 노브고로드, 키예프 등 내륙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루스인들을 이끌던 지도자 류리크는 862년 노브고로드 공국을 건국했고, 류리크 뒤를 이은 올레그는 키예프까지 점령해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여기서 공국(公國)이란 군주(왕)보다는 권위나 권력이 약하지만 독립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진 공(公)이 지도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노브고로드 공국은 베체(Veche)로 불리는 귀족과 상인의 합의제 회의에서 공을 임명하는 귀족공화국 체제의 특징을 보여 노브고로드 공화국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노브고로드 공국에서 확장된 키예프 공국은 올레그의 뒤를 이어 류리크의 아들인 이고리, 이고리의 아내 올가(섭정), 이고리의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로 권력을 세습하며 군주가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했고, 10~11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제3대인 스뱌토슬라프는 완전한 슬라브식 이름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북방의 바이킹(노르드인)족이 스뱌토슬라프 시기에 이르러 피지배층인 슬라브족과 어느 정도 동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슬라브족은 북방인들에 의해 군사적으로 통합되고 훗날 여러 루스 공국들이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이면서 종교적 통합을 겪으며 하나의 루스인이라는 초기 민족 개념을 가졌을 것이다.
결국 키예프 공국은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의 공통 시조가 되었다. 또한 키예프 공국의 원형은 노브고로드 공국이다. 그래서 1862년 당시 존재하던 러시아 제국은 노브고로드 공국의 건국(862년)을 기점으로 건국 1000주년 기념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따진다면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건국되어 올해(서기 2024년)로 단기 4357년을 맞이했다. 또한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 우리도 건국 4400주년 또는 삼국 건국 2000주년 기념 행사를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키예프 공국을 바라보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관점은 같지만 우크라이나는 좀 다르다.
관건은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 멸망 이후 키예프 공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세력이 누군가에 있다. 당시 세력이 강성했던 키예프 공국은 '루스 도시의 어머니'로 불렸고 대부분의 루스를 영향권 아래 두었다. 또한 키예프 공국의 지배자를 대공이라 불렀다. 또한 키예프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림=나무위키) 키예프 공국의 문장
(그림=나무위키) 13세기초 루스 공국 지도
노브고로드와 키예프 일대가 초기 러시아의 중심지였다면, 오늘날 러시아의 제1수도인 모스크바 일대는 과거 변방이었다. 키예프 공국 중심의 슬라브족들은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략으로 세력이 흩어져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3개국으로 분화된다.
일단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키예프 공국 멸망 이후 정통성이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공국의 정통성이 남서부의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분류된다.
몽골의 침략으로 슬라브권이 3개국으로 분화된 것은 지정학적 이유가 크다. 유목 민족의 주무대인 초원 지대와 직접 연결된 키예프 지역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북부의 모스크바 지역은 몽골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모스크바보다 몽골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던 벨라루스는 아예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를 받았다.
키예프가 자랑하던 드넓은 흑토 평야는 유목 민족의 침략에 가장 취약했다. 아울러 강력한 국력을 기반으로 몽골에 끝까지 맞섰던 키예프는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만다.
모스크바 공국은 키예프 공국과 달리 몽골의 비위를 맞추며 몸집을 불려 슬라브권의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모스크바 세력은 14세기에 킵차크 칸국의 공주와 정략 결혼에 성공하면서 조세 징수권을 획득, 주변 공국들로부터 상납금을 걷어 몽골에 바치는 대공국으로 발전했다.
또한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겨 모스크바는 종교 중심지로도 부상하게 된다. 이렇게 힘을 쌓은 모스크바 대공국은 15세기 후반(1480년) 킵차크 칸국과 무력시위를 벌이며 대치할 정도로 힘을 길렀고, 몽골이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권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이반 3세)은 킵차크 칸국과의 조공계약을 불태우고 몽골과의 전쟁에 나서는 정면 대결을 택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루스 공국들이 힘을 합칠 것을 당부하고 이러한 지원을 원을 등에 업고 모스크바 공국과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이 연합군을 결성하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러시아 초기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몽골의 압제에서 벗어난 슬라브인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과 러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과정에 대해 알아본다.
(그림=나무위키) 10세기 전후 유럽 일대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질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키예프 공국의 영토. 회색 부분이 키예프 공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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