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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서 성관계 하라"고 명령했다는 푸틴?

    전문위원 이상현

    2024.10.11 10:42
    "직장에서 성관계 하라"고 명령했다는 푸틴?

     처음 용기를 낸 기자는 <서울신문> 소속이다. 2024년 9월21일 오전 9시46분. ‘오타니 반려견’, ‘싱가포르 식물공원의 박쥐 잡아먹는 청설모’ 등 최근 한 달간 147건이나 되는 기사를 썼다는 기자는 주된 분야인 국제뉴스 이외에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문다혜씨(문재인 대통령 딸)’ 등 사회 분야, “윤석열 대통령 ‘北 핵시설 공개 관심끌기용’” 등의 정치 분야까지 폭넓게 보도해왔다.

     

     기사는 “블라디미르 푸틴(72) 러시아 대통령이 점심시간과 커피 타임 등 직장에서의 휴식 시간을 이용해 성관계를 하라는 황당한 요구를 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은 병력을 18만명 증강해 총 238만명, 현역병은 150만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끝맺었다. “9월15일(현지시간)자 영국 메트로 등 외신 보도”라고 출처를 밝혔다.

     

     첫 외신 보도에 따르면, “점심시간, 직장에서, 성관계” 발언자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보건장관인 예브게니 셰스토팔로프 박사’였다. 프리모리예 지방은 블라디보스톡을 주도로 하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연해주’다. 어떤 현지 기자가 “많은 사람들이 바빠서 아기를 가질 시간조차 없다”고 하자 셰스토팔로프 연해주 보건장관이 “직장에서 매우 바쁘다는 것은 궁색한 변명이다. 쉬는 시간에도 임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서울신문> 소속 다른 기자는 같은 날 오후에 쓴 같은 주제의 다른 기사에서 외신 보도의 진원지가 러시아 <모스크바타임즈> 13일자 기사라고 밝혔다. 이 매체는 이름과 달리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지난 7월 러시아 법무부의 ‘러시아에 바람직하지 않은 비정부기구’ 목록에 올랐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 직장에서, 성관계” 발언은 거리낌 없이 푸틴의 발언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들은 일제히 “푸틴, 점심시간에 직장에서 성관계해라 요구”라는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첫 보도의 바통을 이어받은 <서울경제신문>은 같은 날 오후 2시38분 첫 보도를 받아 인터넷판에 실었다. 그런데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보건장관’으로 적었던 ‘예브게니 셰스토팔로프’가 ‘러시아 보건부장관’으로 돌변한 것이다. 출처는 당초 <메트로>에 미국의 <뉴스위크>가 하나 더 명시됐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사회부' 소속으로 표시돼 있다.

     

    한국 언론, 구매력 기준 GDP 4위 강국을 짓궂게 희화화

     그래도 약간의 진전은 있었다. 첫 보도 이튿날 밤인 9월22일 23시56분에 수정된 <조선일보> 보도는 “점심시간, 직장에서, 성관계” 발언이 푸틴의 것이 아님을 표시했다. 하지만 ‘예브게니 셰스토팔로프’를 여전히 러시아 보건부장관으로 적시했다. 난임치료 지원사업 등 러시아 정부의 노력을 ‘의무 검사’로 여겨지도록 표현한 점도  다른 보도들과 얼추 비슷했다. 

     

     잊혀지는 듯 했지만, 나흘 뒤인 9월26일 오전 6시41분 이 건이 뉴스에 다시 등장한다. 첫 보도한 <서울신문>이 꺼진 불씨를 다시 지폈다. 사회 섹션에 주로 실리는 기사를 한 달에 132건을 쓴다는 또 다른 기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장에서의 휴식 시간을 이용해 성관계하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라고 첫 문장을 썼다. 그렇게 “점심시간, 직장에서, 성관계” 발언이 푸틴의 것이 아님을 표시했던 <조선일보>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음흉하고 기괴한 러시아 기사가 나흘만에 부활한 계기는 러시아 하원 ‘국가 두마'가 올해 ‘러시아 가정의 해’를 맞아 가칭 ‘무자녀 옹호 금지 법률안’을 입법했다는 뉴스였다. 이 법안이 24일(모스크바 현지시간) 의회에 제출된 사건을 26일(한국시간) <연합뉴스>가 보도하면서 꺼져가던 “점심시간, 직장에서, 성관계” 얘기가 한국 언론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자녀를 낳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 국가가 법률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반론, ‘표현의 자유’ 침해 등 논란을 낳은 이 법률안은 사실 2022년에도 발의됐다가 지금껏 빛을 보지 못했다. 인터넷과 미디어, 영화, 광고를 통해 자녀 출산 거부를 조장하는 정보 유포를 방지하는 게 법안의 뼈대다. 러시아 당정은 “개인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게 아니라 무자녀 생활 방식을 장려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라며 강한 입법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두 번째 보도 다음부터 등장하는 모든 기사들은 “점심시간, 직장에서, 성관계” 얘기의 진원지를 푸틴 대통령으로 확정했다. 연해주 보건부 장관 ‘예브게니 셰스토팔로프’를 여전히 러시아 보건부장관으로 명시했다. 모든 매체들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장에서 성관계를 갖도록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독자들은 러시아를 ‘대통령이 국민에게 성 관계를 명령할 수 있는 우스꽝스럽고 황당무계한 나라’로 오해하게 됐다. 러시아가 독일을 제치고 구매력평가(PPP) 국내총생산(GDP) 세계 4위가 됐지만, 한국 언론매체들은 러시아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묘사할 의지가 없다. 한국이 이 부문 14위로 밀려난 점을 알리지 않은(모를지도) 것과 연관이 있을 지 모를 일이다. 한국인 독자들은 메달권 밖 순위에 거의 관심이 없는 ‘담대함’을 지녔으니 그럴 법하다.

     

    이른바 ‘정론지’들, 외신 베껴쓰기에 급급한 뒤에도 “뭐 어쩌라고?”

     지구촌 어디에도 대통령이 개인에게 성관계를 명령할 수 있는 국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러시아 합계출산율(1.5명)을 ‘25년 만에 최저치’,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의 2024년 상반기 합계출산율(0.71명)을 한 번이라도 고려했는지 모르겠다. 러시아 합계출산율이 인구 수가 유지되는 대체출산율(2.1명)을 밑돌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51명) 수준이라는 점을 확인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외신보도를 그대로 번역해 옮기는데 급급했을 듯하다.

     

     기자도, 독자도 누구도 푸틴이 설마 그런 명령을 내렸을지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어느 누구도 러시아 보건부 장관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 미디어가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도 아닌, 해당 과장의 이름을 잘못 보도했다면, 아마도 미디어 전문지까지 나서서 언론의 부실함을 개탄할 지 모른다. 한국 입장에서 러시아라고 대충 기사 쓰고 막 대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는가. 혹시 엉터리 기사를 고칠 언론이 있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감에 밝혀 둔다.러시아 연방정부 보건부 장관 이름은 미하일 무라슈코(Михаил Альбертович Мурашко, Mikhail Albertovich Murashko)다. 그는 해당 발언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별 기대는 없다.  

     

    (사진 타스 연합) 미하일 무라슈코 러시아 보건부 장관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보건부 산하 심장학 연구센터 레나트 아크추린 부소장의 영결식에 참석, 애도사를 하고 있다. 

    전문위원 이상현

    스푸트니크 한국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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