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4.10.23 11:46지구촌이 여러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지만, 지구 인류가 합의해서 전쟁을 막거나 끝내지 못하고 있다. 단일한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이다. 유엔이 있지만, 거부권이 주어진 5개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영・중・러・프)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못하면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진행중인 이스라엘 가자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누군가 새로 불씨를 지피고 있는 남중국해, 대만해협 전쟁 위기 등이 모두 상임이사국들의 이해관계가 상호충돌한 결과다. 동서고금 인류가 합의로 전쟁을 끝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갈수록 더 힘들어 진다는 자조적 분위기가 지구촌에 가득하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추가 선출
개발도상국들의 달라진 위상으로 고려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확대한다면, 문제가 달라질까. 만장일치가 더 어려워진다는 형식 논리에도, 대륙 등 지역적 인류 대표성을 좀 더 현실화 한다는 점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모두 확대를 지지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추천하는 상임이사국 후보가 다르다는 점. 미국은 수십 년째 일본을 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22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열린 쿼드(QUAD) 정상회담을 마무리 하는 공동선언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대표가 새로운 상임이사국 멤버로 참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을 촉구했다. 대표성을 강화하고 더 포용적이며, 투명하고,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며, 민주적이고,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유엔을 개혁하자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말한 4개 지역에서 가장 확실한 곳은 바로 아시아의 일본이다.
러시아는 어떨까.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 21일(현지시간) <토론과 사실(Argumenty i Fakty)>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인도와 브라질, 아프리카 대표 국가 등은 지구촌 다수의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오래 전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돼야 했다”고 밝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로 인도를,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나라로 브라질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 러시아는 인도를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추천
치우치지 않고 자기 중심적 외교 기조를 이어온 것으로 유명한 인도는 지구촌 최다 인구를 보유한 나라다. 사실 일본과 아주 친밀한 외교관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 후보 자리를 놓고 미국(일본)과 러시아(인도)가 정반대로 갈렸다.
미국 외교 전문지 <디플로마트>는 지난달 ‘인도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 4가지 장애물’(9월 20일자)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4가지는 ▲중국의 반대 ▲거부권 없는 자격에 대한 이견 ▲미국의 이해관계 ▲남아시아 지역의 난제 등이다. 미국의 시각이 잘 드러나는 분석 기사다.
우선 ‘중국의 반대’는 미국이 내심 반기는 대목. 미국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아시아 대표로 일본을 밀어왔기 때문에, 중국이 자국과 국경 갈등 등의 문제로 맞서온 인도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구도가 나쁘지 않다. 반사이득도 만만찮다. 하지만 중국은 인도가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인도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22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16차 브릭스 정상회담에서 만난 인도-중국 양국 정상은 국경 분쟁을 둘러싼 갈등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자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니까 디플로마트의 첫 번째 장애물은 그 의미가 옅어졌다.
미국, 엄격한 외교중립 표방하는 인도 마뜩찮아
‘거부권 없는 자격에 대한 이견’은 사실상 미국이 일본을 상임이사국에 끼워넣으려 내놓은 꼼수다. 미국은 이미 속으로 낙점한 아프리카 2개국과 독일, 인도, 일본을 상임이사국으로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거부권은 지금대로 유지한다는 건데,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상임이사국 의결이 만장일치 방식이기 때문에, 미국이 원하는 안건은 의결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미국이 싫어하는 안건에는 미국만 거부권을 행사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이탈리아 주도로 캐나다, 멕시코, 스페인, 파키스탄, 한국, 터키 등 유엔의 ‘합의를 위한 연합(UfC)’을 포함한 그룹이 주장했지만, 미국이 배후다. 인도가 한국을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 ‘미국의 이해관계’는 미국이 인도를 확실히 자기 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2020년 자이샨카르 인도 외무장관은 자신의 저서 <인디아의 길>에서 “미국과 협력하고, 중국을 관리하고, 유럽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안심시키고, 일본을 활용하고, 주변국을 끌어들인다”는 인도 외교의 핵심을 적시했다. 러시아는 원래 인도의 우방이기 때문에, 설혹 미국과 협력하더라도 다른 의심을 하지 말도록 안심시킨다는 게 핵심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전지전능한 자신을 러시아 우방국(인도)의 협력 대상 정도로 여기는 인도가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이밖에 ‘남아시아 지역의 난제’는 인도 내부의 종교적・지역적 갈등과 파키스탄과의 군사・외교적 갈등 등 남아시아 역내 인도의 리더십 문제로 인도가 아시아 대표성을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다.
러시아 “유엔 헌장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선 곤란”
라브로프 장관은 21일 러시아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유엔은 불의를 보면 즉시 돌진해 불을 끄는 일종의 ‘고귀한 영웅’이 아니라 회원국들의 조직”이라고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정한 규칙대로 운영되며, 그 중에는 거부권이 보장되는 안보리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이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고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에 대해 다섯 차례나 거부권을 활용했고, 그걸로 끝이었다”며 “지금 미국은 이스라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당사자가 되는 안건이 상정된 경우 만장일치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갈등을 심화시키지 않고 조정하는 역할조차 다른 상임이사국을 공격하기 위해 악용되는 경우가 문제라고도 지적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1994~2004년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로 재임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당시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한 갈등을 완화하는 데 안보리 상임위가 기여한 수많은 결의안이 채택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갈등을 악화시키지 말자는 결의안 대신 러시아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안보리에서 통과시키는 데 혈안이 된 상임이사국이 있다고 개탄했다. 미국 얘기다. 상임이사국의 권한이 개별국가의 이익을 위한 특권이 돼 유엔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대리전 위해 거두절미, 모르쇠로 일관한 서방의 유엔헌장 무시
주권 원칙과 영토 보전, 국가의 자결권 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뤘던 1970년 유엔 총회도 소환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당시 유엔 헌장에 따른 국가 간 우호 관계 및 협력에 관한 국제법 원칙에 대한 선언이 채택됐다”면서 “모든 사람은 국민자결원칙을 존중하는 정부의 국가의 영토 보전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하며, 그 결과 해당 국가의 국경 내에 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고 지적했다.
2014년 2월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잡고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의 공식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계획을 즉시 알린 극단주의자들이 크림반도나 돈바스에 사는 친러 우크라이나인들을 젼혀 대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꺼낸 얘기다. 유엔 헌장을 ‘영토 보전’이라는 도그마에 가두려는 서방의 억지 주장을 공식 비판한 것이다. 유엔 헌장에 명시된 영토 조항은 형식적인 것이며, 인종・성별・언어・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음을 강조했다.
유엔이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특정 국가의 본성을 정당화・합리화 하는데 악용돼 온 기구인 반면, 진실과 평화를 위한 명백한 사실규명과 합리적 조정이 필요한 계기 때마다 아무런 역할도 못한 유엔의 무능력에 대한 개탄이다.
(사진=러시아 외무부 제공)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러시아 잡지 <토론과 사실>과 인터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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