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이휘경
2024.11.06 13:23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실에 근거할 것 같은 역사조차도 기록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감춰졌던 역사는 진실 찾기가 가능할까? 은폐되었던 역사의 상흔은 오래간다. 기록을 부정하고 숨기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나고, 겨우 다시 조명된다 하더라도 진실을 규명하는 맥락에 따라 역사가 다르게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0일,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노벨상이 발표되는 스웨덴 현지에서 맞는 한국인 작가의 수상 소식이라니. 소름이 쫙 돋았다. 때마침 외교 학회 잡지에 올릴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글을 준비하며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던 참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적 산문’이라는 선정 이유와 함께 한강 작가에게 2024년 노벨상을 수여했다.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광주 5·18 민주항쟁, 제주 4·3 사건 등 여전히 제 실체를 다 밝히지 못한 역사에 대한 책을 쓴 작가의 수상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가라는 추상적 권력 아래 피해를 입고 소외되어 온 개인들의 삶과 그 서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세계사적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제주 4·3 사건은 ‘빨간 섬’이라는 주홍 글씨로 인해 수십 년 간 쉬쉬되어 왔고, 약 50년 만에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받으며 진실 찾기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역사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대량 학살의 생존자들은 피해자라는 서사 아래 제한적으로 발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명 과정은 더뎌졌다. 게다가 대량 학살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의 실체는 역사의 저편에서 관망되는 수준이다.
한국 광복 전후의 역사에는 냉전의 역사 또한 깊이 얽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외국 학생이 한국 전쟁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고립되었던 한국의 남쪽 섬 제주에서 냉전의 심화와 함께 반대 세력 지우기, 즉 제노사이드가 일어났단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또, 제주 4.3 사건은 국제법상 제노사이드라는 명칭을 부여받지 못했고, 국내에서도 그 명칭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아 제주 4·3 희생자의 묘비는 여전히 백비다. 그러니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상 수상 발표에서 제주 4·3 사건이 ‘사건(Incident)’이 아닌 ‘대량 학살(Massacre)’로 서술된 것은 의미가 크다.
5·18 민주항쟁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향한 강력한 열망을 드러낸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세계사적으로 봤을 땐 민주주의라는 가치조차 국제 정치의 맥락에 따라 외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새 역사를 썼다’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한국 문학이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라고도 볼 수 있다. 비로소 한국 역사 속 개인의 서사가 주목되고, 국제 정치의 흐름이 한 사회에 집단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전면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의 조각들이 더 넓은 맥락 안에서 해석되고 중요한 사례로서 인지될 수 있다는 점은 인류의 국제정치사를 써내려감에 있어서도 분명한 의미가 있다.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과거 박근혜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에 한강 작가가 있었다는 점, 경기도 교육청 유해 도서로 채식주의자가 있었다는 점 등으로 국내에서 수난을 겪었던 작가와 작가의 책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서사가 언론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 또한 성찰해 봐야 할 요소이지만, 그보다도 한국의 역사 그 자체가 조명되고 세계사적 측면에서 또한 해석될 기회가 열렸다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진=연합뉴스)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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