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학생 칼럼니스트 이휘경
2024.11.23 09:10 한국의 외교는 오랫동안 안보와 경제 문제로 인해, 적극적인 외교 노선의 다변화보다는 한반도 주변 4대 강대국 사이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균형 외교 노선을 지향하며 특히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쪽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북핵 위협에 대비하는 동시에 경제 성장의 가도를 놓치지 않고자 한 것이다. 물론 2016년엔 사드 문제 배치로 중국이 한한령을 내려 경제가 장기적으로 위협받은 적이 있었다. 또, 2022년 미국의 인플레이션법으로 반도체 산업의 위기설이 돌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서도 이익을 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는 균형적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 이후엔 워싱턴 선언을 시작으로 미국과의 밀착 관계가 본격적으로 조성됐다. 당시 핵 문제와 관련해 독립적 지위를 완전히 포기한 것과 다름없지 않냐는 우려 섞인 여론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심화되며 서구 국가들이 점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에 기대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중립적 지위를 표방했던 핀란드와 스웨덴조차 연이어 나토에 가입하자 미국의 군사력을 주축으로 한 결집은 어딘가 당연시되는 듯 흘러갔다.
하지만 윤 정부의 한국이 안보 및 경제에 대한 신중하고 실리적인 고민 없이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며 미국과의 유착 관계를 공공연히 하자, 북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아태 지역 전략의 일환인 한미일 협력 강화에 조응하니 북한도 북중러-한미일 구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러시아에 무기 지원까지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과 북한의 외교적 간극은 더욱 더 벌어지고 물리적인 형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 전쟁이 장기화되며 유럽 내에서도 전쟁 지원 중단의 여론이 우세해지고 있으니, 가치 외교를 우선했던 한국에게 좋은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때,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트럼프 후보의 대선 승리는 국제정치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경합 지역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약 300 명의 선거인단 확보가 예측되면서 트럼프는 단단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n First) 지지 세력을 전면에 보여줬다. 트럼프 당선인은 자신의 이너 서클, 즉, 각 부처의 장관 후보들을 연일 공개하기 시작했고, 그 중 미국의 대표적 기업인인 일론 머스크와 비벡 라마스를 새로운 부서인 정부효율성위원회(DOGE) 수장으로 호명하면서 기업가 출신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는 미국의 기업가적 정치 노선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핵 위협에 대비해 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에서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여론이 조금씩 나오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방위비 분담금을 적극적으로 강조했고, 이로 인해 당선 이후 현재 유럽은 물론이고 한국도 긴장 상태다.
서론이 길었다. 안보와 경제 모두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한국의 외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트럼프 정부가 이끄는 미국의 행동은 높은 예측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최악의 상황을 우려만 하는 게 아닌 아예 실제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적극적인 새로운 외교 노선 탐색에 나서야 할 때다. 국제 평화의 리더 내지 세계 경찰의 지위에 대한 미국의 또다른 방식의 접근은 5년 단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세계 지배 질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국제 관계, 외교 역시 긴 시선으로 그 너머를 내다봐야 한다.
미국 외의 국제 사회 내 인권, 환경, 사회, 복지 등 모든 면을 후순위로 두는 미국의 행보는 그 외 국가들이 비전통적 안보 협력, 즉 미중 경쟁 구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독립적이고 인도적인 규범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청사진을 만들어야 할 중요한 시기임을 암시한다. 그 형태는 개별적이면서도 협력적인 모습일 것이다.
국제 사회의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다양한 비국가 행위자가 등장할수록 소수의 강대국들에만 국제 질서 유지를 기대하기 어려워진 건 오래된 사실이다. 따라서 글로벌 거버넌스의 공백을 채우고, 다변화 되어가는 국제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이 있는 중견국의 역할이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중견국 중 하나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으로부터의 안보 위협과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인 특성을 제쳐둘 수만은 없다. 또한,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 정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전략 내지 기술 관련 협력 방안을 모색할 기회를 강조한다. 이렇듯 트럼프 후보의 당선은 동전의 양면처럼 위기이자 기회로 풀이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기회다. 한국이 줄다리기 외교 노선을 택해왔던 건 국제 정치의 가장 기본적 전제가 되는 불확실성이 상존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트럼프 시대는 상대적으로 낮아진 불확실성을 의미하고,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동시에 자주적으로 비전통적 국력 또한 키울 탐색해볼 시기일 수도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미국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한국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규범 권력으로 다양한 국제 문제 논의에서 핵심적인 행위자로 자리했던 유럽은 이번 러-우 전쟁으로 정치적 난쟁이임이 다시 한번 증명됐다. 유럽연합 정치인들과 일론 머스크 사이 긴장은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고, 유럽을 향한 미국의 군사비 투자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과 환경 등을 강조하던 유럽의 정체성은 빛을 발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는 한국에 있어 더욱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유럽과의 전략적 외교로 규범적 권력 획득을 노려볼 기회이기도 하다. 강조하건대, 이는 당장 전통적 안보 차원에서의 협력을 하자는 것이 아닌 장기적 안목에서 한국이 앞으로 자주적인 방식으로 국력 증진을 선택하는데 무리가 없게끔 비전통적 국력부터 키워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국제 무대의 주요 행위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 외에도 떠오르고 있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경제적 단계에서부터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아프리카 내 국가 등 다양한 국가들이 땅과 바다 너머에 존재하고 있단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북한 문제를 고려해야 하고, 또다시 이에 대한 제약을 언급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로도 보이는 이 시기를 적절히 활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선진국이 된 한국은 이미 많은 밭을 일구어 왔고, 이젠 씨앗을 뿌릴 때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6일 한 시민이 서울역 대합실에 놓인 TV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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