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4.12.11 13:25대통령 탄핵 위기 속에서도 윤석열 정부 내각은 한미일 및 한일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외교 기조가 북러 관계 밀착을 가속화 했다는 게 러시아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물론 북러 관계 밀착 추세가 뚜렷해지는 것을 곧바로 한러 관계 악화로 연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인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동맹국들을 자기 진영에 철저히 묶어두려 했던 미국의 영향력에 변화가 생긴 만큼 한국도 새 전략적 사고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경제 협력에도 안보주권 행사 못하면 한러 관계 복원은 요원
성원용 인천대 교수(경제학 박사)는 지난 9일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국제질서의 재편과 유라시아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주제로 열린 ‘2024년 유라시아21 정책포럼’에서 “러시아는 안보를 손상시키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 적이 없으며, 이런 점에서 오래 전부터 진행돼온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을 가속화 시킨 것은 한미일 군사안보 협력”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성 교수는 “1884년 조러 통상조약 이후 러시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라고 한 적이 있나”라고 반문한 뒤 “한미일 군사 안보 협력의 가속화가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을 앞당겼고, 미국의 지시대로 이 구조를 맹목적으로 유지하는 한 북러 관계는 상상 이상으로 진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안보와 경제 협력을 대체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한러간 경제 협력은 계속 진행될 수 있겠지만, 경제 협력이 안보를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약으로 공고해진 북러간 밀착은 이미 전쟁 이전부터 착착 진행돼 왔는데, 한미일 군사안보 협력에 휘둘려 온 한국은 이를 보지 않았고(못했고), 이는 근본적으로 온전히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예속 상태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성 교수는 “2022년 2월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가 부족한 포탄이나 병력을 보충하려고 북한을 필요로 했는가, 과연 그 이후 북러 관계가 밀착됐는가”라고 반문한 뒤 “사실 꽤 오래 전부터 북러 관계의 밀착은 시작됐지만, 우리가 안 보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019년 9월 김정은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 때 남북러 3자 협력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대한민국에 과연 주권은 있는가, 자신의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를 논의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취지로 말하면서 남북러 3각 협력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러는 한국과 협력하려 했는데 한국 못 따라와”…우크라 파병설도 의문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마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러 밀착이 본격화 됐다고 보는 것은 비상식적인 접근이라는 게 성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러시아 전쟁 파병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입장이다.
성 교수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이야기가 나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 북한군이 보이지 않는다”며 “혹자는 극동에서 땅굴을 파서 쿠르스크까지 간다라고 하는 (비아냥 섞인) 이야기도 한다”고 파병설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왜 북한군은 쿠르스크에서 모두 전사자로 보도가 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서 “현실을 못 보고 있기 때문에 유령을 쫓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기정사실화 하고 한국군의 심리전단 파견을 주도해온 국가정보원 홍장원 제1차장은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직후 경질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 포고령에 따른 정치인 체포에 소극적이었던 자신을 경질했다는 것이 홍 차장의 주장이다. 다만 윤 대통령이 탄핵 대상이 된 것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또는 파병 준비가 중단된 것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러 관계를 북러 관계 밀착과 굳이 연관해 생각할 필요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장세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날 포럼에서 북러 관계 기조 발제를 통해 “북러 관계와는 별개로 한러 관계의 효능감을 다시 한 번 고민하고 관계 복원과 재충전 노력을 위한 고민, 전략적 사고가 필요할 때”라고 주장했다.
장 연구위원은 “북러 관계 진전이 한러 관계 퇴행 또는 정체, 파탄이라고 보지 않는다”며 “한러는 나름의 공유 이익이 있고, 그것을 위해 30년 넘게 협력을 통해 그 효능감을 느껴왔다”고 지적했다. 또 “”북러간 과도한 밀착 과정에서 러시아가 북에게 줄 ‘우리가 우려하는 반대 급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북러 관계와 별개로 한러 관계의 효능감을 다시 한 번 고민하고 한러 관계 복원에 나설 시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쟁을 빨리,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종결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게 중요하며, 이를 통해 한국의 외교적 운신의 폭 자체를 넓혀 스스로 외교 공간을 넓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미의 대러 정책 동조화 강도, 속도 약화시켜야
한국은 3일 시작된 계엄령 정국 이후 한미 동맹이 훼손될까 봐 가장 걱정을 하고 있다. 한미, 한일 등 주요 외교 일정이 계엄 여파로 속속 취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 이후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가 무기한 연기됐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의 방한도 보류됐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첫 방한 계획 역시 무산될 전망이다. 다만 10일 일본에서 열린 한미일 3국 북핵 협의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한국의 고위 관료들은 계엄령 정국을 맞아서도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굳건한 한미 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역시 이번 계엄령 정국이 한미 동맹에 조금이라도 해를 입힐까 걱정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미 관계가 한국과 다른 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100% 규정하는 접근법은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은 태도라는 지적이 많다. 이대식 태재미래전략연구원(옛 여시재) 선임연구위원은 “유라시아 대륙이 서로 연결되고 그 연결의 고리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과정에서 우리만 유라시아에 등을 돌리고 옛날 형님만 계속 바라봐야 되느냐”고 한국의 미국 편향 외교를 비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더라도 미러 관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기 전까지는 한러 관계도 현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방향을 표방해야 한다는 주장도 눈에 띈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전 주러시아 공사)는“그간 한국은 미국의 대러 정책에 충실히 동조해 왔고, 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러시아에 대해 거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대러 제재는 객관적으로 상징적 의미가 있을 뿐”이라며 “러시아가 체감하는 고통은 미미하지만, 한국 기업들 특히 현지 투자 기업들 의 피해가 상당하므로 미러 관계의 동향을 봐가며 적절한 시기에 해제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진=이상현 기자)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가 지난 9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포럼에서 축하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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