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1.04 20:38“레닌의 시신 매장을 가로막고 있는 게 뭔가요.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떠나 레닌 묘의 방부 처리된 시신은 이교도적이고 불경한 관습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언젠가는 아마도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의 상황에서 당장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단 한 가지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제 입장입니다.”
지난 12월19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말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언론 <스파스TV>의 체냐 악쇼노바 기자의 질문과 그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답이었다. 레닌의 시신은 방부 처리돼 모스크바 크렘린궁 외벽 혁명열사 묘역의 별도 개방형 석실묘에 안치돼 있다. 지난해 11월말 레닌 묘를 방문해서 직접 봤던 레닌의 시신은 마치 곤히 잠을 자는 사람처럼 피부가 탱탱하고 생동감까지 느껴졌다. 레닌 묘의 존치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사망하자 수많은 추모객들이 한겨울 추위를 뚫고 모스크바로 몰려왔다. 그의 유해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장례식 후에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 “시신을 보존해 후대에 부활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전보가 소련의 경향 각지에서 쇄도했다. 후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를 포함한 다른 혁명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닌의 시신 방부 처리를 결행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는 성인이나 성자의 유해가 안치돼 숭배의 대상이 돼왔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천주교와 정교회 전통이 있는 유럽 교회들 일부에서는 아직도 성당 안에 유골을 안치하고 있다. 부활을 믿는 종교적 관습임이 분명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마르크스주의 국가 소련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원래 신부 지망생이었다. 그는 대중에게는 늘 숭배 대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레닌을 우상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레닌의 후계자인 자신의 집권 기반에 도움이 될 걸로 봤다. 스탈린이 영웅을 기리는 대중 심리를 악용, 레닌 유해를 영구 보존키로 결정했던 이유다.
이렇게 100년 동안 지속됐던 레닌 묘지를 크렘린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지하지만 시기와 방법을 놓고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심하다.
러시아 자유민주당(LDPR) 소속인 보리스 체르니쇼프 러시아 하원 부의장은 “국가의 중앙 광장에서 레닌 묘지를 제거하고 레닌의 시신을 철거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왔다. 그는 “붉은 광장은 러시아 사람들의 대표적인 놀이 명소인데, 레닌의 묘가 관광지 곁에 있다는 것은 레닌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에 대해 공산당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모든 재앙과 승리, 비극과 업적을 포함한 국가적 역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현대 러시아 국가의 초석 중 하나”라면서 “붉은 광장에서 소련의 혁명열사 묘역을 철거하려는 욕구는 국가적 기억에 대한 분노이며 그들 자신의 과거와의 전쟁”이라고 체르니쇼프 부의장의 주장을 반박했다.
거센 논란이 끊임 없는 속 저명한 정치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이리나 아르크치스의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인 2022년 1월 <리아 노보스티> 칼럼을 통해 “자유민주당과 공산당 양측이 신성모독죄로 서로 비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며 “레닌 묘 이장에 대한 지지자와 반대자의 입장은 반대라기보다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러시아는 사회 체제에 관한 새로운 실험을 포기한 슬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주가노프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면서 “이 이슈(레닌묘 처리)를 좀 더 미뤄두는 선택이 가장 올바른 결정인 것 같다. 러시아는 그다지 급하지 않다. 시간이 있다”고 결론을 냈다. 최근 푸틴의 답변과 같은 맥락이다. 현재대로 레닌 묘의 존치 필요성을 얘기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 사람들은 소련 역사에서 멀어질수록 덜 강렬하고 더 밝게 소련을 기억한다. 러시아 사회는 소련에 대해 확고한 감정 대신 가볍고, 따뜻하며,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편이다. 과거를 미워하는 대신 역사적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물론 아르크치스는 레닌 묘 논란에서 현행 유지를 주장하는 공산당 측의 손을 들어주는 것과 별개로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정반대편에 서서 자신들만의 이익에 상응하는 역사적 주제만을 악의적으로 차용하곤 하는, 가슴 아픈’ 소수 정치세력(공산당을 지칭)의 인질로 잡혀 있다”며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했다.
오늘날 러시아 사회의 약 3분의 2가 크렘린궁 곁 레닌의 무덤을 포함한 혁명열사묘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3분의 1이라고 해서 소수인 것은 아니다. 다수가 원한다고 무조건 옮은 것은 아니며, 다수결로 강행하는 정치는 필경 국가 분열의 상처를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정치 철학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푸틴 대통령은 “방부처리 중단을 포함해 레닌 묘 이장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당장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 판단에 따르면, 현재의 좌우, 신구, 보수-진보, 과학-주술이 모두 존중된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에는 옳았던’ 시대정신의 세대가 모두 죽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싸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지혜가 담겨있다. ‘형식 논리’를 어감처럼 허투루 생각하면 안 된다. 레닌은 “방법론(형식)이 곧 사상(내용)”이라고 한 인물이다.
인류는 자신이 만든 ‘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기에게만 유리한 방식을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강변하곤 한다. 하지만 물리적 무력과 정신적 강압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민주주의’라야 이름값을 할 것이다. 당장 그게 어려운 상황이라면 무력과 강압을 동원하지 말고 기다리는 지혜가 절실하다.
한국 역시 러시아 ‘레닌 묘 논쟁’처럼 좌우, 신구, 보수-진보가 극명하게 갈리는 현안들이 많다. 푸틴의 ‘레닌 묘’ 해법은 한국 정치와 경제, 행정 지도자들도 충분히 참고할 만한 지혜다.
(사진=크렘린 제공 영상 캡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9일(현지시간) 연말결산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소통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