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5.14 09:11유럽 지도자들은 요즘 ‘유럽 재무장’에 진심이다. 하지만 ‘재무장’이라는 구호 자체가 “지금의 무장 수준이 최저 수준”이라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지역 안보를 과도하게 의존해왔던 미국의 경제 상황 악화와 지구촌 리더십 위기는 유럽 안보의 축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존재 기반 자체를 허물고 있다.
러시아는 서방의 고전적 지정학(Geopolitics)에 내재된 ‘반인류성’과 ‘배타성’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번 기회에 유엔을 ‘다문명주의(multicivilizationism)’에 기반한 진정한 지구촌 대표기구로 변화시킬 것을 모색하고 있다.
외교・안보적으로는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유럽의 중심성을 부정하고 유라시아 주도의 새로운 평화・안보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한다. 더 이상 미국만 바라볼 수 없게 된 일부 유럽 국가들, 서방 중심주의로 조성된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지구촌 거버넌스(지배구조)를 묵묵히 감내해온 피해국들부터 하나씩 규합하고 있다.
유럽 “어차피 재무장은 불가피, 차제에 방위산업 투자!”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의 날’인 지난 9일(이하 현지시간) 브뤼셀 EU 본부를 방문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를 만나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강력한 위치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이엔 위원장은 최근 독일의 국방비 대폭 증액 계획을 환영한다면서 “EU의 추가 국방비 지출 문제에 대한 시각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메르츠 총리를 한껏 추켜세웠다. 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3월부터 회원국들이 2030년까지 최소 8000억 유로(한화 약 1268조원)의 방위비를 증액하자면서 이를 위해 EU 재정준칙 적용을 유예하는 ‘국가별 예외조항(national escape clause)’을 발동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라이엔 위원장은 전승절에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안한 30일 휴전이 수용되고 이행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군사적・정치적 지원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전쟁 비용을 갹출하는 것과 함께 우크라이나 방위 산업에 대한 투자 재원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프랑스 매체 등의 보도에 따르면 10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메르츠 독일 총리,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키이우를 방문, 젤렌스키와 만났다. 우크라이나 매체들과 <유로뉴스>는 이와 관련, “EU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30일간의 휴전을 위한 제안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가짜뉴스 검증그룹인 GFCN(Global Fact Check Network)은 전문가들은 “이번 아이디어가 EU와 미국의 합작품이라는 보도들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부활절 휴전, 전승절 휴전 등을 무시했던 우크라이나와 EU 지도부가 ‘30일 휴전 카드’를 꺼낸 것은 우크라이나 지원 개념에 대한 EU 내 합의를 분명히 하고 러시아 제재의 명분을 찾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모스크바가 30일간의 휴전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며칠 내에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가 도입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힘 실어주는 미국…“유럽 재무장? 글쎄?”
앞서 전열을 가다듬는 기회가 아닌 ‘근본 해법을 찾는 궁극적 종전’을 강조해온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EU 지도부의 간계를 간파했다. EU 지도부의 ‘30일 휴전’ 얘기를 듣자마자 즉각 “튀르키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직접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젤렌스키가 제안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거들었고, 미국 언론매체들은 미국의 품격을 생각해서 “푸틴과 젤렌스키에 대한 트럼프의 최후통첩”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미국 매체들은 유럽의 자체 재무장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다. 미국 없는 나토는 구호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참여 없이 유럽 국가들이 ‘의지의 연합’만으로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무기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고, 무기 공급 없이는 우크라이나는 결국 주저앉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주요 EU 회원국들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많은 무기를 지원했고, 따라서 자국 방위를 위한 무기 재고가 부족한 상황이다. EU에게 “가능하지도 않은 자체 재무장 방침을 버려라”는 미국의 메시지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NBC>는 트럼프 특사 휘트코프가 우크라이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22가지 제안 목록을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할 예정이며, 여기에는 미국이 키이우의 나토 가입 지지를 철회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와 함께 전략적 위험을 축소하려는 미국은 유럽과 당연히 이해관계가 갈린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는 지난달 30일 “유럽의 군사화와 나토 및 EU의 공격적인 수사로 러시아와 미국이 전략적 위험 축소가 방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단지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불허’라는 합의면 족할까? 결코 아니다. 어차피 우크라이나 분쟁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 동맹국 간의 균열이 뚜렷이 드러났다. 따라서 러시아는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 변화를 꾀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러시아, 새로운 외교・안보 개념 다듬는 중…”서방이 지구의 주인 아냐”
러시아가 꾀하는 신개념 안보는 유럽이 속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서방, 특히 미국 주도의 파괴적 군사 개입이 역설적으로 유럽에서 모든 국가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집단안보체제 구축을 망쳤다고 판단하고 있다. 게다가 이는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해서 자국의 안보를 추구해선 안 된다”는 ‘안보의 불가분성’ 원칙을 구현하는 데도 걸림돌이 됐다. 서방 국가들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유엔 헌장 제8장에 명시된 지역기구로 완전히 제도화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차단했다. 이는 냉전 종식 이후 유럽 내 문제의 근원이 되는 그 어떤 해결책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러시아는 이런 상황에서 유럽 안보는 확장된 유럽, 곧 유라시아 안보 구조 속으로 통합하는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구조의 구체적인 방식과 메커니즘은 서방 국가의 참여 없이, 가령 상하이협력기구(SCO) 같은 형식을 통해 다른 하위 지역 기구들과 연계해 구축될 수 있다. 철저히 국가 간 협력에 기반하며, 유엔 헌장의 목표와 원칙, 모든 국제법 규범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국제 관계의 이념화・군사화를 거부하는 원칙이 명확히 명문화 돼야 한다. 이것이 나토의 실패를 올바르게 반면교사로 삼는 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체제는 문명 간 대화에 기반, 각 문명 고유의 가치와 발전 모델을 존중하며, ‘주권 평등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러시아가 새로 제안하는 안보 구조는 포괄적이고 다층적이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이는 참여 국가들의 합의에 기반한 유연한 협력 체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원칙은 과거 군사・정치 동맹과 그들의 엄격한 규율, 대립과 전쟁 준비에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 특징지워진 서방의 ‘편가르기’ 정치에 정면으로 맞선다. 러시아는 이런 새로운 개념의 국제안보 시스템이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러시아는 이 새로운 안보 시스템에 유럽 국가들에도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서방의 정책적 좌표와 패러다임, 특히 유라시아 중심인 러시아 통제와 ‘해양을 통한 포위’를 중심으로 한 ‘고전적 지정학’을 초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존 서방의 안보 개념에 대항하는, 현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포괄적 안보 개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서방의 견제 정책과 무력 개입, 제재 압박의 대상이 된 국가들의 안보와 발전 이익이 주요 기준이 돼야 한다는 관점이다.
러시아는 당면한 미국의 중국 견제가 바로 서방의 기존 ‘지정학적 접근’이라고 본다. 따라서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유엔을 장악해 통제하면서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충족해온 서방으로부터 유엔 기구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 유엔을 무력화 시켰나?…한계에 이른 서방의 위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은 오늘날 유엔의 주요 기관들이 서방에 의해 사실상 마비되거나 통제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서방이 제재와 무력, 직간접 견제 등 온갖 수단으로 사용해 배타적인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의제들을 유엔 프레임워크 밖으로 끌어낼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아울러 서방 엘리트들에게 ‘유엔 통제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하고, 모든 문명권이 평등한 위치에서 이념의 기반을 벗어난 진정한 지구촌 거버넌스를 갖추는 ‘유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집단서방(collective western)이 이미 과대 대표됐다고 본다. 그럼에도 미국은 자신들이 사실상 점령한 독일과 일본을 상임이사국으로 추가하려 집착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미일 군사안보전략의 하위에 위치한 한국도 윤석열 정부 집권기 국책연구원 소속 학자가 “한국이 G7+ 멤버가 되는 조건으로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격을 지지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6월14일 “유라시아에서 양자 및 다자간 집단안보보장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모스크바와 민스크는 ‘21세기 다양성과 다극성을 위한 유라시아 헌장’을 공동 개발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러시아는 당장 우크라이나와, 이후 러시아로부터 안보를 위협당한다고 느껴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와 스웨덴을 포함한 나토 회원국 전체, 그밖의 세계 모든 나라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러시아는 핀란드와 스웨덴 양국 정치 지도자들이 바이든의 지정학적 접근이 승리할 것으로 오판하고 내린 선택에 후회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본다.
두 나라를 비롯해 나토 회원국이지만 나토의 약한 고리인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손짓에 화답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분쟁에 참전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북한이 서방의 제재와 무력, 직간접 견제 등을 가장 많이 받아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해외우려실체’들이 지구촌 주류가 됐다
러시아는 중국과 이란, 북한과 함께 미국이 ‘대외무역법’ 등에서 열거하는 ‘해외우려실체(FEOC)’에 속한다. 러시아는 서방의 의도와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미국의 FEOC 국가들이 겪어온 수모와 집단 따돌림, 악선동, 편파적인 취급 등을 적극 문제제기 하며 이들을 앞장서서 대변하고 있다.
중국과 전략적인 협력을 재다짐하고, 이란과 협력의 폭과 수준을 높이고 있다. 북한에 대한 유엔의 누적적 영구 제재에 대해 국제법리에 입각한 문제 제기에 나서면서 군사적 위협과 경제 제제가 아닌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노력은 단순히 새로운 냉전을 조성하려는 차원이 아니다. 새로운 질서를 관철시키려는 러시아의 차원이 다른 야심이다. 물론, 서방이 기존의 기득권 사슬을 총동원해서 왜곡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진심은 빠른 시간 안에 지구촌에 알려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모스크바 전승절(5월9일) 행사에서 EU 주요국들이 단지 러시아에 반대하기 위해 ‘반나치즘’ 역사에 대한 지구적 공감대를 부정한 행위들을 목도했다. 군사, 정치, 경제에 이어 ‘도덕적 역사’의 영역에서도 무너지고 있는 서방을 뼈아프게 바라본 것이다. 미국을 살리기 위해, 자국의 암 덩어리를 가감없이 드러낸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의 새로운 시스템 구상에 얼마나 공감하고 협력할지 세계는 지켜보고 있다.
(사진=타스 연합뉴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오는 15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조건 없이 우크라이나와 평화협상을 시작하자고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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