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1.10 17:02다산 정약용 선생을 포함한 동서고금의 현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덜 만나게 되는 ‘인간관계의 생애 주기’를 논했다. 20대까지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가 가족을 이룬 뒤 차츰 줄어 50대가 되면 친구 모임을 자제한다는 얘기다. 경제 활동 없이 공부하고 노는 게 주업인 세대가 갖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친구에 더 의존하는 심리 상태 때문에 젊은 시절 친구를 더 많이 만난다는 설명이다.
내 가족을 이룰 때, 더 이상 친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런 섭리를 외교・안보에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최강대국 미국과 러시아, 중국은 이미 각자 자신만의 인생 항로를 가고 있는, 사람으로 치자면 성인(adult) 국가들이다. 물론 이들 강대국들도 친구가 있다. 우방국이라 부르는데, 사실 친구보다는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가족에 가깝다. ‘가족’은 따뜻한 느낌의 단어이지만, 폭력적 위계 질서가 불가피하다. 미성숙한 성장기에는 그 폭력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가족 느낌의 유럽 친구(우방)는 네덜란드와 독일, 이탈리아가 있다. 프랑스는 친구처럼 보여도 숙적이다. 아시아에는 일본(성인)과 한국(미성년), 남미에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정도를 꼽겠다.
미국은 가족 같은 우방(동맹)국들이 성장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에너지 순수입국인 독일과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은 미국의 관계 설정 방식에 따라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다. 이제 얼추 자립의 길로 들어선 뒤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간혹 미국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리 있게 이견을 내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미국은 살짝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가출(세계대전)했다가 돌아온 탕아들을 먹여 주고 입혀주며 재워줬는데, 이제 성인이 됐다고 자기가 잘나서, 자기 혼자 큰 것처럼 행동하는 게 영 마뜩잖다.
그래서 미국은 결심한다. ‘그래, 너희도 너희 인생을 스스로 꾸려 갈 때가 됐지. 성인이 된 걸 인정하마. 다만, 무릇 자유에는 비용이 들지 않겠니? 우선 성인이 될 때까지 너희를 먹여주고 입혀주며 재워준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말인데, 적어도 우리 가문 대대로 원수지간인 ‘훡(FEOC, 해외우려실체, 중・러・북・이란)’ 편을 드는 건 도리가 아니겠지?’
독일과 일본이 미국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제왕답게 미국은 냉혹하고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고, 모든 게 명확해졌다. 독일과 일본은 값 싼 러시아 에너지를 더 이상 못 쓰게 됐다. 대신 미국이 2010년 개발에 성공한 셰일 에너지를 써야 했다. 무기와 군대, 그리고 이것들이 제공해온 안전 보장도 더 이상 무료가 아니었다.
유럽 “순진함 버리고 재무장”…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
미국은 여전히 단호하고 당당하다.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9일(현지시간) “미국은 러시아 가스가 자국 영토를 통해 유럽으로 운송되는 것을 중단하겠다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을 지지하며, 이 조치가 러시아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럽은 미국과 긴밀히 협력한 덕분에 에너지 공급 다양화에 성공했으며, 미국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50%를 유럽에 공급하게 됐고, 앞으로도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러시아 경제가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가디언>조차 같은 날 “2024년 유럽은 러시아 LNG 1780만 톤을 구매했으며 이는 사상 최고량”이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른 일부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유럽의 군사 재무장 필요성을 절감했다. 다만 EU의 리더격인 독일과 프랑스는 온도차가 있다. 숄츠 독일 총리는 9일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로 늘리자는 트럼프 제안은 비현실적”이라고 밝혔다. 당초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약속한 뒤 선거에서 참패, 약정한 30억 유로 지원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나온 반응이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부총리도 이날 “GDP 대비 군비 지출 비중을 3.5%로 늘리는 것은 현실적이지만 이조차 일시적”이라고 방어막을 쳤다.
반면 프랑스는 유럽의 자체 재무장을 강하게 주장한다. 소피 프리마 프랑스 정부대변인은 지난 8일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최근 발언을 빗대 “우리는 순진함을 버리고, 더 의식적으로 유럽 파트너들과 함께 재무장 하고 국방과 디지털, 우주산업 투자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기가 끝난 미 바이든 정부는 이런 프랑스의 방향성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은 9일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앞으로 몇 달 안에 프랑스의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미사일 방어계획(MD) 등 지구적 군사안보 계획의 큰 그림 속에 유럽 안보를 배치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다.
유럽 재무장은 한국 방산의 악재…혁신 계기로 삼아야
독일과 프랑스의 미묘한 입장 차에도 불구하고 유럽 재무장은 가시권 안에 들어왔다. 이준곤 건국대 방위사업학과 겸임교수는 지난 3일 한 방위산업 세미나에서 “프랑스가 미국에 이어 무기 수출 2위에 오르는 등 무기 강국으로 급부상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유럽은 2020년까지 무기 체계 개발을 거의 안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본격 무기 체계 개발로 자체 재무장을 하고, 무기 수출에도 본격 나설 전망이라는 설명이다.
유럽의 재무장 분위기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우선 유럽의 자체 재무장 분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폴란드 방산 수출에 기대를 걸고 있는 한국을 긴장시킨다. 폴란드가 한국 무기를 사도록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이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한국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이런 작은 위기는 오히려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트럼프 2기 내각이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동맹국 한국에 대해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하려 한다면, 한국도 프랑스처럼 군사적 자립을 도모하는 쪽으로 과감하게 나서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폴리티코>는 “한국이 2025년에 자체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트럼프 2기 내각이 한국에게 그런 변화의 공간을 제공해 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의미다. 세계 방산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몫은 3% 미만이지만, 순위로 보면 6위다.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트럼프 2기 내각과 발맞춰 앞으로 4년 군사・외교・안보를 경영해야 한다. 낮은 예측 가능성이 여러모로 추가적인 비용을 낳겠지만, 혁신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른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우르르 몰려 다녀야 불안감이 해소되는 10대, 20대 청년기’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아직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당분간 ‘한미일 군사협력’과 같은 구호를 더 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호를 ‘신념’ 혹은 불변의 원칙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결혼 해서 자녀 낳고 가정을 꾸린 성인은 자주 외롭다. 그렇다고 10~20대 청년기로 되돌아가 부모에 의존하는 안온한 삶을 살 수는 없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닥친 역경에 목숨 걸고 맞서야 한다. 그게 어른이고, 성인이다.
(사진=AP 연합뉴스) 지난 7일(현지시간)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플로리다주 마라라고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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