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이상현
2025.01.31 11:022025년은 한러 교류 35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민간 부문의 다양한 공동행사가 활발해질 전망이다. 정국 변화에 따라 많은 기회와 도전이 있겠지만, 양국 관계 앞날은 여전히 희망과 불안 사이를 오가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내내 ‘비우호국가’ 상태인 한국 윤석열 정부 외교팀과 버거운 관계를 유지해 온 피로감이 역력해 보인다. 혼란스러운 한국 정치 상황이 자칫 한러 관계에 악영향을 줄까 숨죽이고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어떤 가치 판단도, 간섭도 안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자칫 내정 간섭 구설수에 오를까봐 극도로 조심하는 모양새다.
미국이 러시아를 약화시키려고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의 목숨과 동맹국들의 경제적・외교적 희생을 강요한 전쟁임을 거듭 호소하며, 전쟁 수행 중에도 한국 정부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주한 러시아 대사는 전쟁 이후 한러 무역이 크게 줄어든 점을 안타까워 하며, 조속한 회복을 희구했다. 북한과 러시아의 외교 관계는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끝까지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보내지 않은 한국인들의 결정에 경의를 표했다. 전쟁 이후 한국 정부의 조치로 중단된 한러 직항 비행기를 조속히 재개하고 싶다는 의지도 표현했다.
윤석열 정부까지는 비우호적 외교관계
외교부는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러시아 외무부의 관련 논평에 대해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국회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결정된 지난해 12월 14일 “대한민국 국내 정치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이 궁극적으로 양국 관계 회복 가능성을 방해하지 않고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자 한국 외교부는 이튿날인 15일 이 언급에 대해 “주한 외교 사절이 우리 국내 정치 상황과 양국 관계를 연계하여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외교부의 태도는 필요 이상의 과민 반응으로 비쳐질 수 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지노비예프 대사의 발언 당일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대통령 탄핵 상황을 설명했다. 골드버그 대사는 이날 밤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에 “(한국 외교부 장관의 설명을 잘 들었고) 미국은 항상 대한민국과 이곳의 민주적·헌법적 절차를 지지하며 한국 국민과 함께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대사의 발언 역시 외교부가 지적한 바 그대로 “한국 국내 정치 상황과 양국 관계를 연계하여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지만, 외교부는 별다른 논평을 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외려 미국의 신뢰를 재확인했다는 점을 반겼다. ‘비우호적 관계’인 러시아에 대해 “네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야”라고 했던 태도와 다른 외교적 잣대를 적용한 것이다.
러시아 외무장관은 단호한 메시지를 보냈다. 윤석열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에 보낸 메시지로 읽힌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러시아는 지난 24일(현지시간) “한러 관계 정상화에 관심 있는 한국의 합법적 정부와 건설적 대화를 계속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서방 제재동참한 한국, 막대한 무역 손실 감내…일부 회복 중”
러시아는 미국 중심 집단서방(collective western)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 이에 동참한 한국의 삼성과 현대, 기아, LG 등 주요 대기업들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했다고 본다.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28일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이 서방 집단의 불법적 반러 제재에 동참, 무역경제 분야를 포함한 현재 러한 관계가 그 견고함을 시험받고 있다”면서 이 같이 밝혔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국 정부는 2022년 대러 수출 상품, 자재, 장비 및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 제도를 도입한 이후 해마다 목록을 확대해왔다”면서 “현재까지 1431개 품목이 수출 금지 목록에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상호 결제 제한 확대와 맞물려 삼성과 LG, 현대, 기아 등 대기업을 포함한 러시아 및 한국 수출 기업들의 직접적 무역 거래를 무척 복잡하게 만들고 있으며, 러한 어업위원회를 제외한 국가간 협력 메커니즘 업무는 전부 멈추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런 교역 중단 때문에 2023년부터 상호 교역량이 감소, 교역 품목 축소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 통계 기준 2024년 양국 무역량은 2023년 대비 거의 4분의 1(-24%) 감소한 114억 3500만 달러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수출은 22.7% 감소한 68억 7300만 달러, 한국의 대러 수출은 25.6% 줄어든 45억 6200만 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특히 2021년 러시아 시장 점유율이 23.8%에 이르던 한국은 자동차 부문에서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모바일 통신 기기 및 가전제품 분야에서도 선두를 내줬다는 설명이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다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우리가 접촉한 이들은 한국이 러시아와의 무역 경제 관계를 유지하고, 서방 브랜드의 러시아 시장 철수로 생긴 새로운 기회를 이용해 다각화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한국의 식품, 화학, 미용, 의료 제품 공급이 증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한 러시아 대사 “한국 정치 상황 상관없이 양국 관계 회복 희구”
러시아 외무부는 최근 한국 국내 정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한러 관계에 투영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도, 관련한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으며, 간섭하지도 않는다는 입장을 재확인 했다. 한국의 많은 정치권 인사들과 일반 국민 여론은 러시아와 다각적 협력을 건강하게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최근 국내 정치에 대한 특정 견해와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어떤 신념을 갖고 있든 상식적인 사람들은 양국 관계 회복이 바로 한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한국 국내 정치 상황의 향후 전개 양상과 상관없이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가 긍정적인 궤도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면서도 “러시아 문학 거장 네크라소프의 ‘그 멋진 시대를 나도, 당신도 살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불멸의 문장을 인용하고 싶지 않다”고 조속한 양국관계 회복을 희구했다.
러시아가 반러시아 제재를 도입한 비우호적 국가들과 최소한의 수준으로 소통을 줄인 가운데, 한국과는 외교적 대화를 완전히 중단하지 않고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지난해에도 러시아 외무차관이 한국을 방문했고, 라오스 아세안 정상회의를 계기로 양국 장관이 만나 회담했으며, 올해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계기로 또 양국 고위 지도자들이 만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는 것. 지노비예프 대사는 “양국 대사관에는 국방부를 통해 파견된 국방무관을 비롯해 다양한 부처의 공식 대표들이 있고, 그들은 관련 정부 기관의 상대방과 상시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다수가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 반대”
러시아 외무부는 한국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한국 외교부를 비롯한 관료사회가 러시아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최근 러시아와 북한의 협력을 둘러싼 소란을 부풀리고, 이것이 마치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인 것처럼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허위 정보들이 널리 퍼졌지만,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 대한 압력이나 러시아 혐오 확산 징후는 없었다는 진단이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다수의 한국 공직자들이 주기적으로 한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입장 재검토 가능성에 대해 말해왔지만, 관련해 실질적 조치까지 이른 적은 없다”고 밝혔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국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고, 우리의 한국 동료들은 이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알고 있으며, 정상급 등에서 제기된 경고를 심각하게 인식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북러 군사협력과 관련, 우크라이나 정보당국이 출처인 가짜 뉴스들이 난무했지만, 한국 사회에는 큰 동요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국 국민들은 언제나 현명함,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이고 대체로 객관적인 태도가 돋보였다”면서 “지구촌 및 지역 현안의 근본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한 이견에도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동료들과 상호 존중하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북러 협력은 제3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그 이행은 국제법에 완전히 부합한다는 점, 순수하게 방어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한러 하늘길 끊긴 지 3년…직항 재개할 때 됐나?
2022년 3월 한국 정부는 유럽연합(EU)의 사례를 따라 일방적으로 러시아 영공 사용을 거부하며 러시아와의 직항 노선을 중단했다. 양국 항공사와 무역업자, 여행객들의 손실과 불편이 심화돼 왔는데 3년이 지나도록 직항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러 양국간 직항 노선 중단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8월 기간 중 러시아에서 한국을 찾은 관광객 수가 한 해 전인 2023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22.8%나 증가해 눈길을 끈다.
드미트리 체르니셴코 러시아연방 부총리는 지난해 6월 러시아가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과의 직항 항공편 운항을 재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6개월 넘도록 실행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직항편 폐쇄로 사할린 등 극동 러시아에서 러시아 국적을 유지한 채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누구보다도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이곳 노인들은 앞서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블라디보스토크와 유즈노사할린스크까지 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어 친척들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된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의 전반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이런 상황은 비정상적”이라고 덧붙였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우리는 항공보안 및 보험 업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 문제를 한국 측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직항 재개 의지를 밝혔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우리는 양국 지방간 직항편을 포함한 직항편 재개가 양국간 관광을 더욱 증가시키고 인문 교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만기 대한항공 전무는 지난해 6월20일 국회에서 열린 한러 관계 세미나(위성락 의원 주최)에서 “양국 교류 복원을 위해 꼭 대한항공이 아니라 러시아 항공사라도, 모스크바가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라도 우선 직항(또는 경유)을 재개하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사진=타스 연합)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 24일 한국 정치가 조속히 정상화 돼 하루빨리 한러 관계가 복원되기를 희망한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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