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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누구에 대한 2차대전 승리인가?…갈라진 세계, 구겨진 역사

    전문위원 이상현

    2025.05.06 08:50
    누구의, 누구에 대한 2차대전 승리인가?…갈라진 세계, 구겨진 역사

    “미국에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은 큰 전쟁이죠.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싸웠습니다. 러시아가 승리했습니다. 여기 서양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금 세상은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반전영화 <플래툰>을 만드는 등 할리우드의 대표적 진보주의자로 꼽히는 올리버 스톤 감독이 지난 3월 러시아 시리우스에서 청년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지식.먼저(Knowledge.First)’ 마라톤 대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트럼프 후보의 명분에 동의하며 공식적으로 지지를 선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스톤 감독의 말처럼 실제로 유럽연합(EU)은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유럽이 기억하건 아니건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러시아의 역할은 명백하다. 러시아는 9일(이하 현지시간) 세계 20여개 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전승절 80주년 기념 행사를 갖는다. 이에 맞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5월 8일 0시부터 11일 0시까지 꼭 사흘 간 휴전을 제안했다. 나치즘에 반대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구 소련과 미국, 유럽 각국들이 반나치의 가치를 공유하는 날에 연합국들끼리 총부리를 겨누지 말자는 취지다. 쿠르스크 수복이라는 군사적 승리를 정치적, 외교적 승리로 공고히 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트럼프 “전승절은 미국의 기념일”…러시아 공과에 찬물 끼얹기

    실제 전승절에 대한 미국이나 서방의 생각은 좀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5월 8일을 승전 기념일로 선포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 나는 5월 8일을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로, 11월 11일을 제1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로 선포한다”며 “지금껏 어떻게 기념할지 아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축하하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우리의 승리를 축하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지금껏 5월 8일을 ‘유럽 전승 기념일(VE Day)’로, 11월 11일을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각각 기념해왔다. 이를 각각 ‘2차 대전 승전기념일’과 ‘1차 대전 승전기념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라는 러시아의 맥락을 인정하되 미국의 기여를 적극 끌어올려 ‘위대한 미국’에 복무시키려는 뜻이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 선포는 러시아의 이번 전승절 휴전 제안이 국제사회에 던질 메시지 파장 및 주도권 다툼에 대한 힘겨루기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전보장이사회 부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3일 “허세 섞인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러시아가 싫으니 2차 대전 승전 담화도 잊으려는 서방…‘시계 제로’

    세르게이 레베데프 독립국가연합(CIS)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를 제외한 모든 독립국가연합(CIS) 국가 지도자들이 승전 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모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폴란드와 프랑스, ​​영국 지도자를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 수반들은 모스크바는 물론 키이우에도 가지 않을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은 이 틈을 타서 런던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

    숱한 정전 노력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근육과 문신을 보여주며 협상력을 높이려 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2일 “펜타곤이 우크라이나와 3억 1050만 달러 규모의 F-16 정비 계약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군산 공군기지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전투기 정비를 한다는 것은 지역에서 군사 전력을 보강한다는 의미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합의에 따라 모스크바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은행 및 에너지 분야를 포함한 새로운 대러시아 제재를 준비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조치를 승인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물론 러시아도 물러서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4월 29일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만나 “벨라루스 전문가들과 함께 무인 시스템을 위한 공장과 연구소를 설립할 준비가 됐으며, 항공기 제조에 관한 협정도 체결했다”고 밝혔다. 벨라루스에는 이미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 초기에 막강한 활약을 보였던 민간군사전문기업 바그너 그룹이 주둔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핵탄두 없이도 핵공격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극초음속 미사일 ‘오레쉬닉’을 벨라루스에 배치할 계획을 밝혔고, 양국이 준비에 착수했다. 벨라루스는 지난 3월 “오레쉬닉용 발사대를 제작 중이며, 러시아로부터 미사일만 오면 된다”고 밝힌 바 있다.

     

    휴전 제안 무시하고 위반해온 젤렌스키의 뜬금없는 ‘휴전 역제안’

    2차 세계대전 전승절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과 별개로 러시아의 ‘3일 휴전’ 제안은 젤렌스키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자국 내 신나치주의로부터 속전 압박을 받고 있는 젤렌스키로서는 사흘 간의 휴전안을 받자니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의 업적을 빛내주는 꼴이고, 안 받자니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는 건 젤렌스키”라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내해야 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젤렌스키와 서방이 내린 결론은 러시아의 제안을 뭉개고 자신들에 불리한 역사는 무시한 채 얼렁뚱땅 현안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젤렌스키는 3일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외국인 손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밝혔다. 80주년 전승절 기념행사 기간에 휴전하자는 푸틴의 제안을 공식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젤렌스키는 “30일간 전투를 멈추자”고 뜬금없는 역제안을 내놨다. 앞서 젤렌스키는 에너지 시설과 주요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자는 푸틴 대통령의 제안을 이미 거부하고 에너지 시설에만 100여 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4월 19일~4월 21일 부활절 휴전 제안에도 무려 4900건의 휴전 위반 사례가 기록(러시아 국방부 집계)됐다.

    4월 2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릭스(BRICS)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 중인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푸틴의 승전 기념일 제안 대신 30일간의 휴전을 하자는 우크라이나의 요구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장기 휴전협정을 준수할 것이라고 전혀 볼 수 없다. 그들의 도발 능력은 잘 알려져 있다”고 일축했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부의장은 앞서 “우크라이나가 부활절 휴전 제안을 ‘거두절미’로 무시하고 곧바로 위반했으며, 이에 따라 키이우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노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는 단 30시간 동안도 사격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 러시아 단기 휴전 제안 잇따라 무시

    이해영_한신대학교_교수(국제관계학부)는 지난달 29일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전승절 휴전 제안을 무시하고 20개 나라 정상들이 참여하는 전승절 기념 행사에 공격을 한다면,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가 신나치즘에 장악됐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젤렌스키는 아주 곤혹스러운 지경에 놓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부활절 휴전 제안 직후 쿠르스크 탈환이 있었고, 미국이 강하게 우크라이나의 협상을 압박하고 있다”면서 “미국은 러시아에 대해 경제 협력 말고는 마땅한 단기적 레버리지가 없지만 우크라이나에는 광물 협상과 군사 지원 지속 등 압박 카드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 “젤렌스키는 외부로부터 강해진 미국의 종전 협상 압력에, 내부로부터는 세력과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발레츠키 같은 나치주의자들의 압력에 동시에 직면하는 형국”이라고 덧붙였다. 궁지에 몰린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전승절 휴전 제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국제사회가 지켜보도록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도했다는 평가다. 

    푸틴의 전승절 휴전 제안은 단순한 휴전이 아니라, 반나치즘 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면서 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해를 돕고 젤렌스키 정권의 본질도 드러내는 다중적 의미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 교수는 “군사 전선에서 승기를 잡았고, 소모전 자체가 정치 전선이기도 했는데, 이제 외교 전선에서 전승절을 변곡점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도의 전술”이라며 “젤렌스키가 종전처럼 무시할 경우 지금보다 더 수세에 몰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긴 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짧은 휴전을 잇따라 무시하자 트럼프 대통령도 화를 내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하순 <애틀랜틱>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곧 파괴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얘기했다.

    유럽연합(EU)이 트럼프가 계획했던 우크라이나 전쟁 조기 종전을 반대하면서 교착에 빠진 가운데, 유럽 군사 상황의 시계는 다시 흐릿해지고 있다.

     

    (사진=AFP 연합뉴스) 지난 3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보르초바야 광장 앞에 마련된 대형 배너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전문위원 이상현

    스푸트니크 한국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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